오피니언 사외칼럼

[해외칼럼] 독재자들이 따르는 새로운 각본

파리드 자카리아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CNN ‘GPS’ 호스트

민주주의 외양은 유지하면서

외부위협 앞세워 교묘한 독재

신종 폭군들, 어디서 배웠나

파리드 자카리아.파리드 자카리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놀라운 뉴스가 터져 나왔다. 정체에 가까울 정도의 정치적 안정성으로 유명한 사우디아라비아는 올해 32세인 왕세자가 친척들을 체포하고 그들의 은행계좌를 동결하며 핵심 요직에서 내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독재자들의 표준운영절차(SOP)가 돼버린 방식을 사우디아라비아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것뿐이다.

이 공식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에서 권력을 장악한 후 한층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먼저 나라 밖으로부터의 위협을 증폭시켜 국민이 정부를 중심으로 뭉치게 만들고 이를 통해 정권에 비상대권을 안겨준다.

푸틴은 체첸과의 전쟁과 테러리즘의 위험을 앞세웠다. 그러고는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라이벌 집단을 밀어내기 시작했는데 당시 푸틴의 경쟁 그룹은 공권력을 능가하는 힘을 지닌 신흥재벌들이었다.

푸틴은 부패를 척결하고 경제를 개혁하며 그에 따른 혜택을 보통사람들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가 국민복리를 성공적으로 증진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10년에 걸쳐 유가가 무려 4배나 뛰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단계는 공식적인 수단과 비공식적인 방법을 총동원해 언론을 장악하는 것이다. 지난 2000년까지만 해도 힘차게 뻗어 가던 러시아의 언론의 자유는 국가의 통제를 받던 소비에트연방 시절 수준으로 떨어졌다.

당연히 러시아에서 사용된 공식의 모든 요소가 다른 곳에서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빈 살만 왕세자는 진정한 개혁가일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성공을 위해 그가 좇는 공식은 중국·터키와 필리핀 등 이질적 국가에 적용된 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지도자들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민족주의, 외부적 위협, 반부패와 포퓰리즘 등 동일한 원료를 사용하려고 든다. 사법부와 언론이 지도자의 속박을 받지 않는 권력의 장애물로 여겨지는 곳에서는 이들 역시 조직적으로 무력화된다.

2012년에 나온 ‘독재자의 학습곡선(The Dictator’s Learning Curve)’이라는 책의 저자인 윌리엄 돕슨은 전 세계의 신종 독재자들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영리하고 세련된 속임수를 습득했다는 선견지명 같은 설명을 내놓았다. “오늘날의 약삭빠른 독재자들은 인권단체 멤버들을 강압적으로 체포하기보다 세무관리나 위생검사관을 동원해 반정부 그룹의 문을 닫아버린다. 두루뭉수리로 쓰인 법은 정부가 위협으로 간주하는 그룹을 잘라내는 예리한 수술칼로 사용된다.”


돕슨은 후원과 선택적 사법 처리를 교묘히 뒤섞은 우고 차베스의 권력 장악 공식을 전한 베네수엘라 민권운동가를 인용하며 “내 친구들에게는 모든 것을, 나의 적에게는 법을”이라는 격언을 함께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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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집권적인 고전적 독재정부는 힘과 기술의 집중화가 이뤄진 20세기의 현상이다. 돕슨에 따르면 “현대 독재자들은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애매한 스펙트럼 사이에서 움직인다.” 그들은 헌법·선거·언론 등과 같은 민주주의의 외양을 유지하지만 그들의 의미를 모조리 거세해버린다.

신종 독재자들은 다수의 집단을 만족스럽게 만들고 후원과 포퓰리즘, 외부의 위협 등을 활용해 국민적 단결과 그들의 인기를 유지한다.

물론 민족주의 조장은 러시아에서 그랬듯이 이란과 치열한 냉전을 치르고 있고 예멘에서도 화끈한 대리전을 벌이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에도 통제 불능의 상태로 빠질 수 있다.

돕슨은 그러나 책을 낙관론으로 끝맺었다. 많은 독재자가 국민적 저항에 부딪혀 속속 축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책을 발간한 후 벌어진 일들은 우울하다. 폭군들이 민주주의자들에게 영향받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자들이 독재자들의 학습곡선을 기어오르는 상황이다.

터키의 예를 살펴보자. 유럽연합(EU)의 정회원이 되고자 열망하던 터키는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향해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다.

오늘날 터키의 통치자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은 자신의 완전한 권력 장악을 가로막는 거의 모든 장애물을 제거했다. 군부와 관료 체제를 무력화시켰고 언론계의 반대자들에게 온갖 종류의 세금을 때리고 규제조치를 발동했으며 잠재적 반대세력인 귈레니스트들을 테러 분자로 낙인찍었다.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통치자들 역시 동일한 놀이책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 한다.

어디를 둘러보나 민주주의의 그림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경향성은 지구상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도 자주 눈에 뜨인다.

인도와 일본은 거의 모든 측면에서 활기찬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치졸한 민족주의와 포퓰리즘, 자유 언론을 위축시키거나 거세하기 위한 조치 등 새로운 시스템의 일부 요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NBC와 (내 근무처인) CNN에 협박을 가했고 다른 매체들에도 각종 형태의 정부조치를 집행했다. 그는 판사와 독립기관들을 공격했으며 오래전에 확립된 민주적 규범을 무시했다. 그렇다면 아마도 미국 역시 위험스러운 학습곡선을 올라가고 있는 중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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