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오후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자리 잡은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블라인드 데이트’라는 전시가 개막했다. 번역하자면 일면식 없는 남녀가 서로 만나게 주선하는 소개팅이지만 이 전시는 작가의 이름을 가린 채 작품을 고르는 아트페어라는 뜻으로 이름이 붙었다. 아트페어는 ‘판매’를 목적으로 다양한 작가의 그림들을 모아놓고 선보이는 자리다.
미술작품에서 작가의 이름은 ‘브랜드’에 해당한다. 이를테면 ‘이우환’의 이름 석 자 때문에 무심히 점(點) 몇 개 찍어놓은 듯한 그림이 수억 원에 팔리는 식이다. 무심히 지나치던 그림도 피카소나 앤디 워홀 같은 ‘아는 이름’의 작품이라고 하면 뒤돌아 다시 보게 된다. “벽지 같다” “뭘 그렸는지 모르겠다”는 푸념 속에서도 ‘단색화’ 열풍에 해당 작가의 작품이 경매에 나오기 무섭게 고가에 팔린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작가의 이름을 가린 아트페어는 말 그대로 계급장 떼고 있는 그대로 맨몸으로 싸워보자는 얘기나 다름없다.
출품한 작가들은 천차만별이다. 국제적으로 명성 높은 작가도 볼 수 있고 30대 미만 신진작가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가격도 10만원대에서 시작해 150만원을 넘기지 않는다. 유명한 거장의 작품을 합리적이다 못해 터무니없이 싼 가격에 장만할 수 있다는 점에 솔깃하고 유망한 작가의 작품을 선점할 수 있다는 미덕도 겸비한 자리다. 전시장의 관객들은 이미지만 보고 선택해야 한다. ‘누구의 작품이라’ 혹은 ‘어느 갤러리가 판매하니까’ 작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순수한 감흥과 취향에 따라 작품을 고르게 하는 것이 이 아트페어의 취지이자 기획의도다.
작품이지만 상품에 빗대 얘기하자면 백화점 명품부터 시장 물건까지 브랜드를 가린 채 같은 매대에 진열해 제품의 질로 경쟁하는 형국이다. 이를 사람 고르는 일로 확장해보자면 학력과 지연 등 각종 배경을 지운 채 인재를 뽑는 ‘블라인드 채용’과도 유사하다.
이름표를 뗀 경쟁에는 보다 정교한 ‘안목’이 필요하고 더 큰 책임이 뒤따른다. 그림이야 내 눈에 만족스러워 내 방에 걸어놓고 보는 것은 문제 될 게 없지만 향후 해당 작가의 지속적인 성장 가능성과 투자가치까지 고려한다면 작가의 명성, 거래하는 화랑의 신뢰도를 무시하고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인재를 고르는 일은 더욱 어렵다. 배경 없이 성장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다못해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마저도 삶의 족적이고 기계적으로 쌓은 스펙도 일정 부분은 노력의 결과라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결국 선택하는 사람의 확고한 기준과 소신·판단력이 중요하다.
대학수학능력시험날이라 수험생은 물론 수험생을 둔 가족 모두 초긴장 상태다. 이 역시 결국은 간판 좋은 명문대의 좁은 문을 뚫고자 애쓰는 이름값 싸움이다. 블라인드 경쟁으로 채용 비리의 뿌리가 뽑히기를, 그로 인해 입시 경쟁의 한파도 사그라들기를 희망해본다. 이 작은 아트페어로 순수한 미술 애호가가 늘어나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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