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워싱턴에서 빨리 떠나고 싶지 않네. 유동성 문제는 그저 헛소리야(just bullshit). ”
지난 1971년 10월, 미국 백악관 집무실에서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이 아서 번스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총재와 나눈 대화 내용이다. 훗날 공개된 이들의 대화 녹음 테이프는 1972년 재선 투표를 앞둔 닉슨 대통령이 경기부양을 통한 재집권을 위해 중앙은행을 어떻게 압박했는지를 만천하에 알렸다. 이후의 통화에서는 번스 전 의장이 연준의 기준금리 인하 사실을 언급하자 닉슨 전 대통령이 만족을 표하기도 했다. 이미 시중의 과도한 유동성이 문제시되던 상황에서 대통령 재선을 위해 연준의 통화정책 결정에 노골적으로 개입한 닉슨은 이듬해 재선에 성공했지만 미국 경제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10년 동안 이어진 극심한 인플레이션이다.
오는 28일(현지시간) 제롬 파월 차기 연준 의장 지명자의 의회 청문회를 앞두고 글로벌 금융시장은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새로운 ‘세계의 경제 대통령’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파월 지명자는 지난 4년간 미국 경제를 호황으로 이끌어온 재닛 옐런 의장과 맥을 같이하는 중도 성향의 비둘기파로 정책변화 없이 안정적으로 시장을 이끌 것이라는 기대감이 크다. 하지만 한편으로 시장은 파월이 이끄는 연준에 드리운 ‘트럼프의 그림자’에 대한 불안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낮은 지지율을 경제성과로 만회하려는 대통령의 입김이 어느 때보다 강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파월이 연준의 독립성을 방어할 능력이 있을지, 파월 지명자는 시험대에 서 있다.
미국은 물론 세계 어느 국가에서도 중앙은행의 정치적 독립성은 해묵은 논란거리다. 특히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 발행을 관장하는 연준의 통화정책 결정은 미국과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정치적 독립성이 어느 나라보다 중시된다.
연준이 독립성을 얻은 데는 1929년 대공황이 계기가 됐다. 연준이 행정부의 지시를 기다리며 대공황 초기에 적절한 대응을 취하지 않고 사태를 방관한 결과 대공황이 발발하자, 1933년 연준 체제가 개편되면서 금리·통화정책 결정 기구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구성한 것이다. 수십 년 뒤 닉슨 전 대통령과 번스 전 의장의 사례는 연준이 정치에 휘둘릴 때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켰다.
위기를 거치며 확립된 연준의 독립성은 때로 경기부양을 위해 금리 인하를 요구하는 역대 대통령들과 소신을 지키려는 연준 의장들 간 갈등을 초래하기도 했다. 연준 의장으로서 최장기간 재임했던 윌리엄 맥체스니 마틴은 해리 트루먼 전 대통령에게 “배신자”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금리를 인상했다.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 또한 재임 실패를 앨런 그린스펀 전 의장이 시행한 긴축정책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연준의 독립성이 확립된 데는 관행적·제도적 장치도 큰 몫을 했다. 전 정권과 현 정권에서 임명한 연준 위원이 조화롭게 구성될 수 있도록 한 인사제도가 대표적이다.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상시 투표권을 갖는 이사(의장·부의장 포함)의 임기는 14년으로 미국 대통령은 4년의 임기 동안 보통 2명만 선임한다. 또 미 대통령들은 통화정책의 독립성과 연속성을 위해 연준 의장에게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는 한 이전 정권에서 임명된 연준 의장을 연임시켰다.
하지만 이 같은 장치는 트럼프 정권 들어 모두 무용지물이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수십년의 전통을 깨고 옐런 의장 연임 대신 파월 이사를 새 의장으로 직접 뽑는 것을 선택했다. 여기에 집권 초기 이사들이 줄줄이 조기 사임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는 이사는 총원의 절반이 넘는 4명으로 늘었다. 옐런 의장이 20일 이사직 사임 의사를 밝히는 서한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내면서 연준의 이사직 공석이 4석으로 늘자 미 경제전문 매체 마켓워치를 비롯한 주요 언론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연준을 재건축할 것”이라며 연준의 독립성 침해 가능성을 잇따라 지적했다. ‘경제성장률 3% 공약’을 앞세운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색깔대로 연준 이사 자리를 채울 수 있게 되면서 사실상 초유의 ‘트럼프의 연준’이 꾸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블룸버그통신은 트럼프 대통령이 연준 의장 지명 과정에서부터 연준을 정치의 진흙탕으로 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며 서바이벌식 ‘게임쇼’처럼 여러 후보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 본인이 지명자를 낙점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연준 의장을 자신의 ‘선택 대상’으로 전락시켰다고 지적했다. 이는 경기부양을 원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앞으로 긴축을 통한 통화정책 정상화를 이끌어야 할 파월 지명자를 압박하려는 사전준비일 수 있다는 얘기다. 블룸버그는 또 트럼프 대통령이 파월 의장을 직접 불러내 요구사항을 전하는 방식보다 소셜미디어서비스(SNS)나 여론을 활용해 연준을 간접적으로 압박하는 한편 자신은 트위터로 한두 마디를 날리는 방식을 택할 것으로 예측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트럼프의 연준’이 초래할 진짜 위험은 백악관이 아닌 월가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연준 이사로 처음 임명한 랜들 퀄스는 칼라일그룹 등 사모펀드 업계에서 활동해온 대표적인 규제완화론자다. 더구나 그가 맡은 직책은 2010년 금융규제 강화법인 ‘도드프랭크법’ 제정 당시 신설된 ‘금융 담당 부의장’이다. 미 언론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인선을 “월가의 승리”로 평가하며 남은 이사 자리도 금융완화론자에게 넘겨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강화된 제재를 본격적으로 풀 경우 또 다른 금융위기가 올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한다.
리사 쿡 미시간대 경제학과 교수는 “어떻게 금융위기가 발생했고 이 규제가 입안됐는지 기억을 지워버린다면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라며 “금융규제 시스템이 생긴 후의 경제가 성장했고 고용이 증가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