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지난 1989년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는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불출석 재판(궐석재판)을 받았다. 불법 방북 사건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은 문익환 목사도 법정 출정을 거부했다. 1990년대 초까지 민주화를 위해 싸운 수많은 인사들은 저항의 수단으로 궐석재판을 선택했다.
그리고 2017년 11월. 국회가 탄핵하고 검찰이 구속기소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재판을 거부한 채 궐석재판에 돌입했다. 주요 혐의는 592억원대 뇌물수수. 30~40년 전 사회 정의와 신념에 따라 궐석재판을 택한 피고인들의 국가보안법·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위반 혐의와 결이 다르다. 시간을 거슬러 1907년 고종 황제의 헤이그 특사로 파견돼 일본의 주권 침탈을 알리다 체포된 이상설 열사가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사실과는 더욱 동떨어져 있다. 역사의 얄궂은 반복이자 아이러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김세윤 부장판사)는 박 전 대통령이 출석하지 않더라도 향후 공판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28일 밝혔다. 재판부는 “어제 안내문을 보내 계속 출석하지 않으면 출석 없이 공판을 진행할 수 있고 방어권 행사에 지장이 있을 수 있으니 심사숙고하라고 했지만 오늘도 피고인은 출석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어 “피고인에게 거동할 수 없을 정도의 신병 문제 등 정당한 사유가 있다고 보기 어렵고 구치소 측은 피고인 인치(강제로 끌어냄)가 현저히 불가능하다고 한다”며 “증인신문 등 심리할 게 많고 제한된 구속 기간을 고려하면 공판기일을 늦출 수 없다”고 설명했다.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권력자의 궐석재판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6년 내란·비자금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전두환·노태우 두 전 대통령도 주 2회 재판에 반발해 변호인단이 총사퇴하고 재판을 거부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가 인치 방침을 정하자 마음을 바꿔 자진 출석했고 각각 사형과 징역 22년에 처해졌다. 박정희 정권의 실세였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망명 중 1979년 실종됐지만 1982년 궐석재판에서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에 전 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
현재 박 전 대통령은 재판부가 선임한 국선 변호인단의 접견까지 거부한 채 재판을 거부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1심 선고 때까지 궐석재판이 열릴 것으로 보인다. 법조계는 검찰이 신속한 진행을 위해 증인 상당수를 철회할 수 있어 이르면 내년 1월께 1심 재판을 마무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 측의 한 국선 변호인은 “(접견을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든 만날 의사가 있다”며 “재판에도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