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금융정책

취약계층 재기 돕는다지만…포퓰리즘에 멍드는 은행

금융위 "두번은 없다" 공언에도

'버티고 보자'는 인식 확산될 우려

금융위 "출연·기부로 재원 충당"

"사실상 준조세" 금융사는 반발

최종구(오른쪽 두번째) 금융위원장이 29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합동브리핑실에서 장기소액연체자 지원 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제공=금융위원회최종구(오른쪽 두번째) 금융위원장이 29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합동브리핑실에서 장기소액연체자 지원 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제공=금융위원회




정부가 1,000만원 이하, 10년 이상 연체한 159만명의 채무를 탕감하는 사실상의 ‘경제대사면’에 나서면서 그동안 빚이 빚을 낳는 악순환의 굴레에 놓여 있던 연체자들의 재기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자력으로는 도저히 재기할 수 없는 취약한 계층의 장기·소액연체자만 선별해 빚의 굴레를 벗겨주면 정상적인 경제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우리 몸이 건강해지려면 가장 아픈 곳을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경제가 건강한 활력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가장 취약한 계층에 있는 분들이 다시 건강한 경제·금융 생활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며 “이번 지원 방안을 통해 사실상 (장기 연체 채무의) 상환이 불가능한 취약 계층의 상환 부담을 해소하고 경제활동으로의 신속한 복귀를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 위원장은 또 “누구도 혼자 부자가 된 사람은 없다”는 엘리자베스 워런 미국 상원의원의 발언을 인용하며 이번 대책에 대한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최 위원장은 개인의 채무 문제에 대해 “경제 상황과 정책 사각지대 등 정부와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할 부분도 분명히 있다”며 “일차적으로 채무자 본인의 책임이지만 부실 대출에 대한 금융회사의 책임도 있다”고 지적했다.

3015A10 소액장기연체자



실제 정부가 이번에 발표한 ‘장기소액연체자 지원대책’의 핵심은 채무 탕감 및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차주(借主)의 범위를 당초 계획보다 최대한 넓혔다는 점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은 국민행복기금이 채권을 보유한 83만명에 대해서만 빚을 탕감해주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번 대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민간 금융회사들이 채권을 가지고 있는 장기소액연체자(76만2,000명)까지 혜택 범위를 넓혔고 국민행복기금 채무자 중 10년 미만 또는 1,000만원 초과 연체자(100만명)에 대해서도 최대 90%까지 원금을 감면해주기로 했다. 이들을 모두 합산하면 약 259만명의 연체자가 빚 감면 혜택을 보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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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부가 사상 처음으로 채무 100% 탕감 대책을 내놓으면서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 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금융위도 논란을 의식해 “두 번 다시 이번과 같은 빚 탕감 대책은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지만 가계부채 문제가 증폭되면 제2, 3의 추가 대책이 불가피해 선언적인 의미로밖에 볼 수 없다는 지적이다. 이번 대책에 따른 학습효과로 이미 ‘가능한 한 갚지 않고 버티다 보면 정부가 해결해줄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금융권의 부실이 급격히 증가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일부에서는 159만명에 대해 재산이 없고 월 소득이 99만원(중위소득의 60% 이하)이 안 돼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을 심사해서 제대로 골라낼지도 의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세청 자료 등을 동원한다고 하지만 재산이나 소득을 숨기고 지원 받는 등 구멍이 뚫릴 수 있어서다. 금융 당국이 “재산을 숨기고 지원을 받으면 엄중한 불이익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경고하고 나선 것도 이 같은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 박근혜 정부 때도 채무 조정이 있었는데 이렇게 조정을 받아가며 빚을 갚은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고 일괄적으로 빚을 탕감해주면 모럴해저드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며 “이미 파산 제도가 마련돼 있는 만큼 파산 제도를 정비하고 보완하는 게 장기 연체자 문제의 올바른 해결 방향”이라고 지적했다.

탕감 재원을 금융회사의 자발적인 출연과 기부금으로 충당하겠다고 하지만 금융회사들은 “사실상의 준소세가 아니냐”며 부글부글 끓고 있다. 민간 금융회사들이 보유한 소액 장기 연체 채권의 원금이 2조6,000억원인 점을 감안하면 매입 대금을 원금의 1%로만 잡아도 260억원을 금융사로부터 걷어 들여야 하는 셈이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교수는 “국내 대부분 은행들은 예금보험공사나 국민연금공단이 대주주로 있어 정부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며 “순수한 자발적 기부로 보기는 사실상 어렵다”고 지적했다.

30일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이 유력시되는 등 금리 상승기이지만 마음대로 대출 금리를 인상하지 못하도록 당국이 가산금리 제한 등에 나서면서 빚 탕감 재원까지 마련하라고 압박하니 은행들은 죽을 맛이다. 일부에서는 금융회사들이 앞으로는 상환 능력에 맞는 대출 심사 관행을 확립하게 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연체 가능성이 높은 저신용자들에 대한 대출은 최대한 억제할 것으로 예상돼 저신용자들이 1금융권에서 대출 받기가 훨씬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렇게 되면 저신용자는 상대적으로 고금리인 저축은행이나 대부업체 등 2금융권으로 밀려나거나 급전을 위해 고리의 불법 사채에 다시 빠져드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다. /서일범·김기혁기자 squiz@sedaily.com

서일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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