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금융정책

밀어붙이기식 대신 옆구리 쿡…'넛지 관치'로 진화

금융당국 발언에 신관치 논란

노이즈 대신 조용히 물러나게 압박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이 4일 돌연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금융계에서는 관치(官治)가 ‘넛지(nudge) 관치’로 진화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넛지는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라는 뜻의 영어 단어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리처드 세일러 시카고대 교수가 내세운 개념이다. 당국이 과거와 같은 밀어붙이기식 관치를 포기한 대신 옆구리를 찔러 인사에 개입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는 것이다.

실제 재선이 유력했던 황 협회장이 갑작스럽게 연임을 포기한 배경에는 최종구 금융위원장의 인사 ‘가이드라인’이 있다는 게 금융권의 해석이다. 최 위원장은 지난달 29일 “대기업 그룹에 속한 회원사 출신이 그룹의 도움을 받아 회장에 선임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현재 금융 유관협회 중 대기업 출신 민간 인사가 수장인 곳은 생명보험협회(이수창 회장)와 금투협밖에 없는데 이 중 연임이 거론된 곳은 금투협뿐이어서 사실상 황 회장을 끌어내리겠다는 의도가 담긴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최 위원장이 민간협회장을 특정하는 듯한 발언을 해 놀랐다”며 “관치가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간섭은 하고 싶어하는 새로운 유형으로 바뀌는 것 같다”고 말했다.


황 회장은 이날 “외교용어로 내가 척결 대상이나 사형 대상은 아니지만 환영받지 못하는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 같았다”며 “제가 살아온 과정과 이 정부를 끌고 가시는 분들의 결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밝혀 재임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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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권 인사는 아니지만 김인호 전 무역협회장 역시 지난 10월 임기 4개월을 남기고 물러나면서 “정부가 사임을 희망하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밝힌 바 있다.

금융권에서는 앞으로 주요 은행 최고경영자(CEO) 인사에서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미리 제시하고 여기에 맞지 않는 인물이 오면 옆구리를 쿡 찔러 자리를 포기하게 만드는 넛지 관치가 성행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최근 은행연합회장과 생명보험협회장 인선 과정에서 당국의 넛지 가이드라인이 상당한 힘을 발휘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종구 위원장이 10월 국감에서 “올드보이의 귀환을 막기 위해 대통령에게 직언도 불사하라”는 의원 요구에 “그럴 우려가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발언한 뒤 각 협회 임원추천위원회에서 올드보이들을 미는 세력의 힘이 많이 죽었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공교롭게도 은행연합회와 생보협회장은 모두 당초 유력하게 언급됐던 관 출신 올드보이 대신 민간 출신 회장들이 차지했다. 금융권의 한 고위관계자는 “그렇지 않아도 외풍이 많은 금융권에 당국마저 교묘한 개입에 나서니 내실을 다질 틈이 없다”고 지적했다.

서일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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