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후4시께 인천국제공항에 필리핀발 국적 항공기가 도착했다. 삼엄한 경비 속에 항공기에서 내려 입국장으로 들어온 승객들의 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이들은 경찰관들에게 둘러싸여 곧바로 대기 중인 차량에 태워졌다.
흉악범을 이송하는 수송기 안에서 벌어진 내용을 다룬 할리우드 영화 ‘콘에어’와 유사한 상황이 이날 인천공항에서 연출됐다. 국내 최초로 필리핀으로 달아난 한국인 피의자들이 전세기를 통해 단체 송환된 것이다.
경찰청 외사국 외사수사과는 사기·마약·폭력 등의 범죄를 저지르고 필리핀으로 도피한 국외도피사범 47명을 전세기를 통해 국내로 송환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송환된 피의자 중에는 보이스피싱 등 사기범이 39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이들로 인한 한국인 피해자들의 피해액만 46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외에도 마약·폭력·절도사범, 부정수표단속법 위반자 등이 포함됐다.
현지에 파견된 경찰관 코리안데스크와 현지 사법기관의 공조로 지난 5월 검거된 보이스피싱 조직 21명도 이번에 송환됐다. 1997년 제3국에서 교민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한 뒤 필리핀으로 도피한 A씨도 올 초 현지 경찰에 검거돼 송환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번 단체 송환 규모는 과거 필리핀에서 한해 송환되는 인원과 맞먹는 수준이다. 올해는 필리핀에서 역대 최대 규모인 총 138명이 송환됐다.
국내 최초의 전세기를 동원한 범죄자 단체 송환인 만큼 호송 과정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현지 이민청 수사관 60명이 차량 20대를 이용해 마닐라 국제공항까지 피의자들을 압송했다. 호송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비해 한국 경찰관들을 대상으로 한 예행연습과 근무수칙 교육이 수차례 진행되기도 했다. 피의자들은 항공기에 탑승한 뒤 곧바로 수갑이 채워져 인천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경찰관 120명의 감시를 받았다. 입국한 피의자들은 관할 경찰서로 신병이 인계돼 조사를 받은 뒤 유치장에 수감될 예정이다.
필리핀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데다 상대적으로 치안이 열악해 범죄자들의 주요 도피장소 중 하나로 꼽혀왔다. 이에 따라 경찰은 2010년 필리핀에 한국인 사건을 전담하는 코리안데스크를 설치해 현지 사법기관과 지속적인 공조수사를 벌였다. 올해 검거된 한국인만 90여명에 이른다. 경찰은 교민을 대상으로 한 추가 범죄와 열악한 수용시설로 인한 피의자들의 인권침해 등을 우려해 올해 초부터 단체 송환을 추진해왔다.
경찰 관계자는 “이번 송환은 국경을 초월한 국제공조수사 역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며 “범죄자는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반드시 검거돼 처벌을 받는다는 원칙을 확립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