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 크리스마스 휴전

2215A39 만파식적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지 한 달여가 지난 1914년 9월 초. 독일군은 영불 연합군과의 ‘마른(Marne) 전투’에서 고전하면서 서부로의 진군에 제동이 걸렸다. 이후 두 달 동안 소모적인 참호전이 계속됐다. 적막감이 감돌던 성탄 전야에 독일군 진영에서 뜻밖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성탄 캐럴이었다. 이내 연합군 병사들도 따라 부르기 시작하면서 전장은 순식간에 합동 공연장으로 변했다. 이어 독일군이 장식과 초를 매단 크리스마스 트리를 연합군 진영으로 가져왔고 이후 병사들은 중간지대에서 무기를 내려놓고 휴전에 들어갔다. 전쟁 역사상 유례가 없는 ‘크리스마스 휴전’이다. 이들은 담배를 나눠 피우는가 하면 전사자들의 합동 장례식까지 치렀다. 이 감동적인 이야기는 2005년 프랑스 영화감독 크리스티앙 카리옹에 의해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마른 전투뿐만 아니라 그해 서부전선 곳곳에서는 양측 병사들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축구를 하는 등 모처럼의 평화를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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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서는 우연찮은 계기로 사적(私的)인 휴전도 종종 이뤄진다. 2차 세계대전 때인 1944년에는 미군 5명과 독일군 4명이 독일 휘르트겐 숲속 오두막집에서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기도 했다. 숲속을 헤매다 지친 미군 병사들이 민가의 문을 두드리고 잠시 후 독일군이 찾아왔다. 양측 간의 총격전이 시작되려는 순간 민가의 아주머니가 “모두 배고프고 지친 몸인 만큼 오늘만은 서로 죽이는 일을 하지 맙시다”라며 휴전을 제의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을 거쳐 이 제의는 받아들여졌고 양국 병사들은 술과 통닭을 나눠 먹고 적군의 부상병을 치료해주기도 했다.

국민의 8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인 필리핀에서 크리스마스 휴전이 이뤄질 모양이다. 외신에 따르면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오는 24일부터 열흘간 공산 반군을 대상으로 하는 군사작전을 중단하라”고 군에 명령했다. 전쟁터는 생사를 넘나드는 참혹한 현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병사들에게 간절한 것은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다. 필리핀 정부군과 반군이 열흘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휴전으로 전쟁의 아픔을 잊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철수 논설실장

오철수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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