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흥행 순위 10위권을 살펴보면 1위 ‘명량’(2014, 약 1761만 명, 이하 영진위), 2위 ‘국제시장’(2014, 약 1426만 명), 7위 ‘암살’(2015, 약 1270만 명), 8위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약 1232만 명), 9위 ‘택시운전사’(2017, 약 1218만 명)로 역사 소재를 다룬 영화가 50%를 차지했다.
역대 같은 10위권 내 범죄 소재 영화는 3위 ‘베테랑’(2015, 약 1341만 명), 5위 ‘도둑들’(2012, 약 1298만 명)로 두 편의 영화가 이름을 올렸다. 최상위권 영화에서 역사 소재의 영화가 득세했음을 알 수 있다. 올해는 어떨까. 2017년 상위권 10위까지 중 역사 소재 영화는 1위 ‘택시운전사’, 5위 ‘군함도’(약 659만 명), 7위 ‘더 킹’(약 531만 명)으로 3작품, 범죄 소재 영화는 4위 ‘범죄도시’(약 687만 명), 6위 ‘청년경찰’(약 565만 명)로 2작품이 차지했다.
올 한 해 역사소재 영화는 지난 1월 현대사 전반을 파노라마식으로 다룬 ‘더 킹’(감독 한재림)으로 시작한다. ‘더 킹’은 무소불위 권력을 쥐고 싶었던 태수가 권력의 설계자 한강식을 만나 대한민국의 왕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과정을 풍자적으로 다뤘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까지 역대 대통령들이 자료화면에 등장하면서 대한민국 권력자들의 추악한 민낯을 거침없이 들춰내 관객들에게 진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현대사 중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두 편의 영화도 개봉했다. ‘보통사람’(감독 김봉한)과 ‘1987’(감독 장준환)이다. 지난 3월 개봉작 ‘보통사람’은 1987년 직선제 거부, 4.13 호헌조치 등 전두환 대통령의 군사독재 시절을 그렸다. 보통의 삶을 살아가던 강력계 형사 성진이 나라가 주목하는 연쇄 살인사건에 휘말리며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는 이야기다. ‘보도지침’이 존재하던 시절 언론의 자유를 갈망하던 기자가 모진 고문을 받다가 숨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모티브로 해 팩션으로 다룬 것이다.
‘1987’은 훨씬 직접적이다.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 1월 14일 스물두 살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 받던 중 경찰 고문으로 사망하고, 공안 당국의 은폐 시도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실체가 폭로돼 그 해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는 과정을 낱낱이 밝힌다. 박종철의 유족을 비롯해 안기부장, 치안본부장, 검사, 교도관, 기자, 일간지 사회부장, 일반 대학생 등이 각자의 역할로 톱니바퀴처럼 얽히고설킨 관계로 격동의 시대를 보여준다. 박종철 열사로 시작해 이한열 열사로 끝나는 구조를 띈다.
‘1987’처럼 민주화를 실현시키기 위해 광장에서 항쟁한 민중들의 이야기로 ‘택시운전사’가 있다. 8월 개봉한 ‘택시운전사’(감독 장훈)는 1980년 5.18 광주민주항쟁을 소재로 했다. 당시 서울의 택시운전사 만섭이 통금시간 전까지 광주에 다녀오면 큰돈을 준다는 말에, 독일기자 피터를 태우고 아무것도 모른 채 광주로 가게 된 실화를 그린 작품. 사건을 무겁게만 접근하기보다 웃음과 눈물을 섞어 택시운전사와 독일기자의 시선으로 광주의 참상을 바라보면서 관객들을 이입케 만들었다.
올해는 일본을 상대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유독 그 피해자의 아픔을 재조명한 영화들도 많았다. 3월 개봉한 ‘눈길’(감독 이나정)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모습을 그리며 묵직한 아픔을 전달했다. ‘눈길’은 일제 강점기 서로 다른 운명으로 태어났지만 같은 비극을 살아야 했던 두 소녀의 가슴 시린 우정을 다뤘다. 9월에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감독 조정래)와 ‘아이 캔 스피크’(감독 김현석)까지 함께 관객들에게 호소했다.
‘눈길’과 ‘귀향’이 피해자의 사연을 드라마 형식으로 다시 그리는 데 초점을 뒀다면, ‘아이 캔 스피크’는 휴먼 코미디로 새롭게 문제에 접근했다. 할머니 옥분이 영어를 배운 뒤 미국 청문회에 가서 위안부 사건을 직접 증언하는 과정을 그리면서 이전에 없던 스토리와 장르적 시도를 통해 웃음과 감동, 메시지를 대중적으로 전했다.
일제에 시달린 조선에 초점을 맞춘 영화는 지속적으로 생겨났다. 지난 5월 ‘대립군’(감독 정윤철)은 1592년 4월, 선조 25년 임진왜란을 재조명했다. 당시 명나라로 피란한 임금 선조를 대신해 임시조정 분조(分朝)를 이끌게 된 세자 광해와 생존을 위해 남의 군역을 대신 치르던 대립군이 참혹한 전쟁에 맞서 운명을 함께 나눈 과정을 전했다. 이름 없는 영웅들의 분투기를 다루면서 백성과 아픔을 함께하며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어린 세자 광해의 성장 과정을 보여줬다. ‘올바른 지도자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6월 개봉작 ‘박열’(감독 이준익)은 일제강점기 독립투사 중 알려지지 않았던 박열이라는 인물의 삶을 들여다봤다. 1923년 도쿄, 6천명의 조선인 학살을 은폐하려는 일제에 정면으로 맞선 조선 최고 불량 청년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 가네코 후미코의 실화를 다뤘다. ‘박열’은 일제 강점기와 맞물린 아나키즘, 부당한 권력에 맞선 용기, 독립을 향한 뜨거운 열망을 표출하며 여전히 막막한 현 시대까지 관통했다.
7월에는 ‘군함도’(감독 류승완)가 일제강점기 하시마섬에서의 조선인 감금과 노동착취를 고발했다. 당시 하시마섬에 강제 징용된 후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하는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다루며 일본의 만행과 민족의 아픔, 열망을 묵직하게 전했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섬에 끌려 온 후 일본으로부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처절하게 울부짖는 조선인들의 모습이 쓰라린 잔상을 남겼다.
10월에는 ‘대장 김창수’(감독 이원태)와 ‘남한산성’(감독 황동혁)이 역사적인 울림을 전했다. 1896년 백범 김구의 감옥 수감 이야기를 다룬 ‘대장 김창수’는 치기 어렸던 청년 김창수가 인천 감옥소의 고통 받는 조선인들 사이에서 모두의 대장이 되어가는 이야기로 김구의 청년 시절 실화를 감동적으로 그렸다. 외골수에 치기 어리기만 한 청년 김창수가 감옥소 안에서 희망을 꿈꾸며 성장하고 죄수들의 대장으로 거듭난 과정은 뜨거운 감동을 선사했다.
영화계는 중국에 치인 수치스런 역사도 마땅히 거울로 삼았다. ‘남한산성’은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 청의 대군 공격을 피해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속에 숨어든 인조와 조정의 치열한 47일간의 이야기를 그렸다.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이조판서 최명길과 청의 공격에 끝까지 맞서 싸워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예조판서 김상헌의 팽팽한 논쟁 사이에서 인조의 번민을 전했다. ‘남한산성’은 ‘무엇이 지금 백성을 위한 선택인가’에 대한 고민과 화두를 던지며 380여 년을 뛰어 넘어 현 시대를 관통하는 묵직한 여운을 남겼다.
이처럼 유구한 역사를 거친 조선과 대한민국은 국내외로 수많은 사건과 전쟁을 겪어왔다. 올해도 그랬듯 이 한 많은 민족이 꺼낼 역사적 화두는 아직도 무궁무진하다. 격변의 사건들은 살아있는 영화소재로 쓰일 값어치가 충분하다. 그리고 관객들은 실존했던 일, 우리들의 일이기에 더욱 뜨겁게 몰입하고 반응한다. 2018년은 어떤 역사소재의 영화가 관객들의 심금을 울릴지 또 한 번 관심이 모아진다.
/서경스타 한해선기자 sesta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