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옛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생긴 순환출자 문제에 대해 내렸던 판단을 2년 만에 180도 뒤집었습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재판과정에서 로비 사실이 드러난 만큼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국회의 지적에 공정위가 응답한 것인데요. 이에 따라 삼성은 순환출자 고리를 재정비 해야 합니다. 내용이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공정위가 새롭게 제시한 ‘합병 관련 순환출자 가이드라인’에 대한 내용을 알기 쉽게 다시 한번 짚어보겠습니다.
◇세 가지 쟁점 중 바뀐 건 단 하나
공정거래위원회의 ‘합병 관련 가이드라인’이 처음 만들어진 계기는 다름 아닌 삼성이었습니다. 2014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공정거래법이 개정되면서 대기업집단 소속회사의 신규 순환출자(기존 순환출자는 인정)가 전면 금지됐습니다. 순환출자 구조는 재벌 총수 일가가 소수의 지분으로 그룹을 장악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이를 해소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보고 법이 개정된 것이죠.
애매했던 건 계열사까리 합병을 하면서 순환출자 고리 밖에 있던 계열사가 새롭게 순환출자 고리 안으로 편입되는 경우였습니다. 법과 시행령에서는 판단을 내릴 수가 없어 삼성은 옛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준비하면서 공정위에 유권해석을 요청합니다.
당시 쟁점은 세 가지였고 이번에 공정위가 다시 들여다 본 것도 이 부분입니다. 첫 번째는 순환출자 고리 내에 합병하는 계열사가 인접해서 붙어 있을 경우 등을 예외로 인정할 지 여부인데, 이에 대한 판단은 2015년 공정위나 2017년 공정위나 같은 판단을 내렸습니다. 두 번째 상황은 기존에 있던 복수의 순환출자 고리가 합병 후 동일해지는 경우입니다. 개별 고리별로 위반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지, 개별 고리별 판단결과 중 사업자에게 가장 유리한 결과를 적용해야 하는지를 두고 2015년 공정위는 개별 고리별로 판단해야 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2017년 공정위도 동일하게 판단했습니다.
해석이 바뀐 건 마지막 쟁점입니다. 삼성그룹의 지배구조와 관련이 깊죠. 핵심은 순환출자 고리 내 소멸법인(옛 삼성물산)과 고리 밖 존속법인(제일모직)이 합병하는 경우 순환출자 고리가 ‘강화’되는 것인지, 아니면 새롭게 ‘형성’되는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이었습니다. ‘강화’로 보면 강화된 만큼만 처분하면 되지만 ‘형성’으로 보면 단 한 주도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2015년 공정위는 ‘강화’로 봤고, 2017년 공정위는 ‘형성’으로 봤습니다. 공정위가 직접적으로 삼성에 옛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과 관련된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해야 한다고 명령을 하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해석을 바꾼거죠.
삼성은 내년 3·4분기 안에 세 가지 옵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삼성SDI가 보유한 현 삼성물산 주식 404만주(5,276억원) 처분 △현 삼성물산이 보유한 삼성전자 주식 598만주(15조2,038억원) 처분 △삼성전자가 보유한 삼성SDI 주식 1,346만주(2조8,406억원) 처분이 그것입니다. 다만 삼성그룹은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하는데 가장 적은 금액이 들고 이재용 부회장의 승계 문제와 가장 동떨어진 첫 번째 안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 공정위가 사실상 “삼성SDI가 보유한 현 삼성물산 주식 404만주를 팔도록 했다”고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사실상 삼성을 겨냥...소급적용도 논란
공정위는 공식적으로 이번 가이드라인 해석 기준 변경이 ‘삼성’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번 개정으로 직접적 영향을 받는 대기업 집단은 삼성이 유일하죠. 공정위가 삼성의 순환출자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이유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특검 수사와 재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특검 수사 과정에서 ‘청와대 등의 외압으로 삼성이 처분해야 할 주식 수가 904만주에서 500만주로 축소됐다’는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재판에서도 옛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따라 발생한 순환출자 변동에 대한 유권해석 과정에서 가이드라인이 작성된 경위와 그 적용에 대해 삼성의 청탁이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내용이 판시된 바 있습니다.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서도 이에 대한 시정을 요청하는 의원들의 요구가 많았습니다. 이에 공정위는 이러한 지적을 받아들여 조치를 취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1심 판결만으로 공정위의 2년 전 결정과 삼성 로비를 연결시키는 건 무리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항소심이나 대법원에서 1심과 다른 해석이 나올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법원의 판결이 달라지면 공정위의 유권해석이 또 달라질 여지도 있는데 이 때문에 정부가 일관된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습니다. 바로 ‘신뢰보호의 문제’죠. 이 때문에 삼성이 공정위와 소송전을 벌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옵니다.
공정위의 이번 발표가 이달 말로 예정돼있는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검찰의 항소심 구형을 앞둔 미묘한 시점에 나왔다는 점에서 삼성으로서는 말을 꺼내기가 더 어려울 것이란 분석도 가능합니다. 삼성 사정에 정통한 법조계의 한 인사는 “연내 이 부회장에 대한 항소심 구형, 또 한 달 뒤쯤 항소심 선고가 예정된 상황에서 이런 발표를 하는 이면에는 재판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가 깔려 있을 수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소급적용도 논란입니다. 2015년 공정위의 유권해석에 따라 삼성이 합병을 진행했는데 이를 다시 뒤집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법이 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급 문제는 없다”며 “공정위 내부 의견일 뿐만 아니라 외부의 법률 전문가들도 공통된 의견”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법조계의 시각은 약간 다릅니다. 익명을 요구한 회사법 전문 변호사는 “모든 법령, 특히 이해관계자가 많은 상법의 경우 그들에게 혜택을 주는 게 아닌 한 소급적용은 거의 없다”며 “행정부 법 해석의 재량권 범위에 대한 문제 제기가 나올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공정위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면서 공정위 내부 책임 규명은 빠졌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삼성 측 로비가 실제로 있었다면 유권해석만 바로잡을 게 아니라 잘못된 해석을 강행한 결정권자의 책임도 묻는 것도 타당 하는 의견입니다.
◇삼성 지배구조에 미치는 영향은
공정위가 이런 결과를 발표한 21일 삼성그룹 지배구조와 관련이 있는 삼성전자(-3.42%), 삼성에스디에스(-4.61%), 삼성SDI(-4.27%) 등이 함께 하락했습니다. 삼성의 지배구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감 때문이었죠. 또 투자자들은 단기간 내에 404만주나 되는 대량 물량이 시장에 풀리면 주가가 내려갈 수 있다는 걱정도 합니다.
하지만 업계 전문가들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중심으로 짜인 삼성그룹 지배구조에 큰 영향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부회장이 삼성물산 주식 17.08%를 보유한 최대주주이고 이건희 회장 등 친인척과 특수관계인의 삼성물산 주식을 모두 합하면 39.08%에 달하기 때문입니다. 공정위 결정으로 삼성SDI가 삼성물산 주식 2.1%를 팔아도 이미 40%에 달하는 이 부회장의 지배력은 막강하다는 설명입니다. 최남곤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삼성SDI의 삼성물산 지분 매각은 삼성물산 주가에나 일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슈”라며 “삼성그룹 지배구조와는 별개로 봐야 할 문제”라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향후 보험업법 개정이나 금융그룹통합감독시스템이 시행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주식(8.19%)을 매각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어 이 부회장에게는 삼성물산 주식이 한 주라도 아쉬운 상황이 올 수 있는 것이죠.
또 이 부회장의 승계 작업이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을 합병하는 방식으로 이뤄질 경우도 삼성 지배구조가 위협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합병에 대비해 이 부회장이 삼성물산 주식을 최대한 많이 보유해야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비용 부담이 상당할 것이란 의견이 나옵니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 삼성SDI가 털어낼 삼성물산 주식 2.1% 가치는 5,000억원선이지만 향후 이것의 가치가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 될 수도 있다”고 예상했습니다.
/세종=강광우기자 pressk@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