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이슈&워치] 출구 못찾는 퇴직관료...死藏되는 국가인재풀

퇴직3년 취업제한 1만6,000곳

로비 막겠다고 도입은 했지만

고급관료 경험·지식 활용 못해

"지나친 취업제한, 국가 손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

불법 엄단하되 취업제한 풀어야







공직에서 30년 이상 일한 고위관료 A씨는 올 들어 공공기관장 제의를 거절했다. 전문 분야였지만 마음에 두지 않았다. 취업제한(퇴직 후 3년) 기간에서 벗어났는데 공직유관단체 임원을 맡게 되면 또다시 3년이라는 족쇄를 차야 하기 때문이다. A씨는 “임기를 다 채운다고 해도 3년 제한을 포함하면 70세가 넘는다”며 “그럴 바에야 민간에서 일을 계속하는 게 낫다”고 했다.

A씨뿐이 아니다. 로비를 막기 위해 도입한 퇴직공직자 취업제한에 고급관료들의 경험과 지식을 활용할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 수십년간 나랏돈으로 키워낸 관료라는 인재풀을 우리 스스로 사장시키고 있는 셈이다.


인사혁신처가 28일 공개한 2018년도 퇴직공직자 취업제한 기관은 1만6,690개로 올해보다 359개 증가했다. 사기업이 1만5,077개로 가장 많고 사립대 등 650개, 종합병원 476개, 공직유관단체 180개, 사회복지법인 168개 등이다. 지난 2014년 1만3,466개였던 취업제한 기관은 2015년 1만5,033개, 지난해 1만5,687개로 꾸준히 늘고 있다.

관료들은 취업제한이 지나치다고 입을 모은다. 기간이 3년인데다 고위공무원이 되면 해당기관과 관계있는 곳에는 취업할 수 없다. 금융당국 내에서는 “협회에 가려면 고위공무원단 승진을 하지 말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온다.

퇴직 후 서울대 초빙교수로 임용됐던 유일호 전 경제부총리와 주형환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되레 운이 좋은 편이다. 상당수 장차관 출신은 취업제한에 쉬고 있다. 공공기관은 취업제한이 없지만 이마저도 몸이 가벼운 1급 출신들이 인기다. 장차관급 인사는 대형 공공기관에 가야 하는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강제 골프족’이 쏟아진다. 공직에 있을 때 못한 골프를 치면서 시간만 보내는 것이다. 전직 차관 출신 고위관료는 “기본적으로 3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길다”며 “갈 수 있는 곳이 없으니 골프장에 가서 죽치고 앉아 있는데 이들이 가진 유용한 지식만 사장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원한 대책반장으로 불렸던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은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약 2년간 금융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을 지냈다. 2011년 1월부터 2013년 2월까지 금융위원장을 지냈기 때문에 다른 곳에 적을 두기 힘들었다. 김 전 위원장은 이후 2015년 4월 법무법인 지평 고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은 취업제한 기간이 3년이지만 2015년 3월30일 이전 퇴직자는 2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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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위원장처럼 연구원에 기대는 고위공무원들도 적지 않다.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과 이승우 전 금감위 부위원장 등이 금융연구원에 몸담았다. 개인 돈으로 시내에 오피스텔을 얻거나 제한 대상이 아닌 중소기업에 이름을 올려두고 취업제한이 풀리기를 기다리는 이들도 있다. 3년 제한 기간이 끝나면 곧장 법무법인으로 옮기는 사례도 있다. 쉬어야 하는 시간이 길다 보니 상대적으로 대우가 좋은 곳에 인적자원이 쏠리는 것이다. 국가경제 차원에서 보면 관료들의 축적된 지식과 업무 노하우가 민간에 고루 퍼지지 못하고 사장되는 꼴이다. 이마저도 금융과 세제처럼 전문 특기가 있을 때나 가능하다.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국가가 세금으로 봉급을 주면서 20여년간 키운 인재들을 사기업에 주지 말고 아무 데도 퍼지지 말게 하라는 것은 자가당착”이라며 “중요한 것은 법으로 취업을 막을 게 아니라 각 회사가 자율적으로 행동강령을 정해 불법 로비를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문관료들이 가지 못한 자리는 비전문가들이 채우고 있다. 금융권이 대표적이다. 금융감독 당국 출신의 금융사 진출을 막자 감사원 인사들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 주광덕 자유한국당 의원실에 따르면 2011년부터 올해 7월까지 감사원에서 퇴직한 53명 중 절반가량인 27명이 이사와 고문·감사 등으로 금융사에 갔다. 2011년 저축은행 사태가 터진 뒤 감사원의 금융사행(行)은 급증했다.

몰래 취업을 하는 경우도 계속된다. 공직자윤리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취업심사 대상 퇴직공직자 중 135명이 심사를 받지 않고 취업했다가 적발됐다. 이 중 45명은 최종적으로 취업제한 결정을 받았다. 이와 별도로 방송통신위원회 고위공무원 퇴직자의 한국전파진흥협회 상근부회장 재취업과 국토부 기술4급 퇴직자의 평화엔지니어링 부사장 재취업 등이 불허됐다.

‘스리쿠션’ 같은 편법도 나온다. 관료들이 민간업체나 기관으로 바로 갈 수 없다 보니 공공기관에 나가 있는 ‘올드보이(OB)’를 문제가 되지 않는 기업이나 협회에 보내고 공공기관 자리에 관료들이 가는 것이다. 현재 퇴직공직자가 취업제한 기관에 재취업하려면 퇴직 후 3년간, 퇴직 전 5년간 일했던 부서와 취업제한 기관과의 업무 관련성, 부당한 영향력 행사 가능성 여부에 대해 공직자윤리위원회의 취업심사를 받아야 한다. 고위공무원단이 되면 직접 일했던 부서뿐 아니라 소속기관 전체를 들여다본다.

관가에서는 과도한 취업제한은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라고 입을 모은다. 국가핵심 인재를 적시에 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엄격한 취업제한보다는 풀어주되 부정청탁 등의 불법행위가 적발될 경우 엄격한 처벌을 하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조언도 한다. 국립대 교수와 정치인을 포함해 국가인재 데이터베이스(DB)에 등록된 5급 이상 국가직과 4급 이상 지방공무원은 8만6,994명이다. 전직 장관 출신 인사는 “취업제한의 목적은 전관예우를 이용하거나 자신들이 공직에서 알게 된 것들을 연계해 이득을 보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며 “그런 목적만 관철하면 되는데 지금은 일률적으로 3년을 적용하다 보니 민간사회와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중요한 길을 막고 있다”고 강조했다.

/세종=김영필기자 susopa@sedaily.com

김영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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