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리를 마련하여 주신 존경하는 대법원장님과 대법관님들, 그리고 바쁘신 가운데에서도 오늘 참석하여 주신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1985년 9월 판사로 임용된 지 32년이 넘었고, 대법관 업무를 시작한 지도 벌써 6년이 지났습니다. 서소문 서울민사지방법원 청사에서 시작한 법관 생활이 서초동 대법원 청사에서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근대 사법제도 100주년을 맞이하여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청사를 옮겨 새로운 역사를 연 지도 벌써 22년이 지났으니 실로 세월의 빠름을 느낍니다.
돌이켜 보면 군법무관을 마치고 백면서생이나 다름없던 제가 법과 정의를 실현한다는 마음 하나로 막중한 법관 업무를 시작하였으니 실로 무모한 도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러한 제가 이제 대법관으로서 임기를 마치고 이 자리에까지 설 수 있었던 데에는, 사법연수원 시절 법관으로서의 호연지기를 말씀하시던 법조 원로를 비롯한 선배 법관들의 따뜻한 지도와, 동료 및 후배 법관들의 성원, 그리고 법원 직원 여러분의 열성 어린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대법관으로서 소임을 마치는 것에 조금이라도 영예로움이 있다면 이는 이러한 모든 분들의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저는 대법관 업무를 시작하면서, 국민 각자가 자유롭게 하고 싶은 바를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사회 전체의 질서와 행복이 이루어질 수 있는 바른 제도를 갖추는 것이 법의 목표이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사회와 국민에 대한 따뜻한 애정에서 출발한 정의로운 보편적 규범 안에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 보호라는 실질적인 형평이 담기도록 재판하여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으며, 지난 6년간의 생활은 미력하나마 이를 실천하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기록에 담긴 당사자의 이야기를 소중히 새기고 관련 법리를 충실히 검토하며, 여러 대법관님들과 다양한 의견을 나누어 합리적이고 보편타당한 결론에 이를 수 있도록, 나름대로 치열하게 한 사건 한 사건을 대하였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틀라스가 두 어깨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두 손으로 하늘을 떠받쳤던 것처럼, 사법의 신뢰를 지탱하여야 하는 최고법원의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는 사명감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절실함이 오늘 이 자리까지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사법의 신뢰는 재판에 있으며, 재판에 대한 신뢰는 그 재판을 담당하는 법관에서 비롯됩니다.
당사자를 대하는 법관은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하고 소송의 진행은 신중하여야 합니다. 필요한 지식을 충분히 갖추어야 합니다.
사회발전에 따라 끊임없이 등장하는 새로운 법적 분쟁과 이해대립의 양상에 대하여 타당한 해결책을 제시하려면 누구보다 법리와 사안에 대한 깊은 통찰이 필요합니다.
결론을 내릴 때에는 냉철하되 형평에 맞는 합리적인 해결이 될 수 있도록 지혜를 발휘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구를 통하여 법률가로서 최고의 전문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치우침이 없이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에 고르게 눈과 귀를 열어 두어 공정과 중립이 자연스레 몸에 배도록 균형 있는 자세를 유지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다수라는 이름 뒤에서 들리는 작은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배려하여, 다양한 이해관계의 조화를 통한 최선의 결론을 찾아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법관의 언행은 신중하여야 합니다. 재판 과정은 물론 재판 외에서도 일반의 귀감이 되어야 합니다.
공직자로서 바른 수신(修身)의 자세는 물론이며, 헌법적 소임을 부여받은 법관으로서 공적 책임에 걸맞은 품행과 헌신이 요구됩니다.
사실 이러한 법관으로서의 기본적인 덕목은 어느 누구보다 대법관에게 요구된다 할 것입니다. 대법원이 내리는 결론은 사건 당사자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도 미치는 영향이 참으로 막중합니다.
저는 대법관들은 높고 끝이 날카로운 첨탑 위에 얹혀 있는 얇은 유리판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유리판은 사법에 대한 신뢰를 지탱하고 있기에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유리판이 균형을 잃어 기울거나 양극단으로 치달아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깨진다면 대법원은 설 자리를 잃게 되고 사법의 신뢰는 나락으로 떨어져 우리 사회에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나니 과연 제가 오늘까지 걸어온 과정이 거기에 미칠 수 있을지 염려됩니다.
부족한 식견으로 인하여 미진함이 있을 터이며, 이로 인하여 누를 끼친 점이 있다면 이 자리를 빌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그렇지만 저는 지난 법원 생활 동안 밀려드는 수많은 사건의 해결을 위해 묵묵히 열과 성을 다한 훌륭한 선후배 법관들 및 직원들을 보아 왔습니다.
특히 대법원에서 해박한 지식과 경륜을 갖춘 대법관님들과 함께 합의하고 논쟁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영광이었으며, 밀려드는 사건을 마다하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준 재판연구관들 및 비서실 직원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이러한 존경스러운 여러분과 사법부 구성원으로서의 무거운 책임을 나눈 덕에 오늘의 이 자리가 가능하였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합니다.
그동안 대법원은 매년 증가하는 사건으로 인한 부담 가중을 해결하기 위해 고법상고부, 상고법원 등의 제도개선을 추진하였습니다만, 여러 사정으로 인하여 결실을 맺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해결책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지난 대법원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상고사건의 흐름을 원활히 할 수 있는 소송절차 개선 방안을 한 가지 제안 드리고자 합니다.
상고절차는 상고장 제출, 상고기록 송부, 상고기록접수통지서 송달, 상고이유서 제출, 상고이유에 대한 본안 심리로 진행됩니다.
현재는 상고장이 적법하게 제출되면 바로 상고기록이 대법원에 송부되고, 상고이유서 제출 및 부적법한 상고이유서에 대한 심사 등의 본안 전의 심사절차가 대법원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상고이유서를 상고장 제출 후 상당한 기간 내에 원심법원에 제출하도록 하고 위와 같은 본안 전의 심사 절차를 원심법원에서 처리하도록 한 후, 본안 심리에 적합한 상고사건만 기록을 대법원에 송부하도록 한다면, 대법원은 사건을 송부 받는 즉시 바로 본안 심리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본안 전의 심사 절차와 기간이 단축되고 또한 그 심사에 들던 대법원의 부담을 줄일 수 있어 당면한 문제점을 상당 정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재항고, 특별항고 사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밖에도 사건의 경중과 유형에 따라 상고제기 절차나 상고이유를 달리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습니다.
결국 상고심 담당 법원을 구조적으로 개편하는 방안 못지않게, 선택과 집중에 의한 재판절차의 개선을 도모할 필요가 있습니다.
경륜도 깊지 않고 또한 법원을 떠나는 제가 주제넘게 많은 말씀을 드린 듯합니다. 오랜 법원 생활 동안 받은 분에 넘치는 애정에 취한 탓이라 선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30년이 넘도록 공직자의 가족으로서 커다란 심적 부담을 안은 가운데 든든하게 곁을 지켜준 저의 아내, 그리고 딸과 아들에게 감사와 사랑의 말을 전하면서, 석별의 말씀을 마치렵니다.
사법부의 무궁한 발전과 아울러 법원 가족 여러분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