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회·정당·정책

[토요워치-팍팍한 세상살이 占 찾는 사회]'믿어서 찾기'보단… '믿고 싶어서' 찾는다

['점'치로 논하는 정치]

직업상 4년마다 선거로 '불안정성' 커

기독교 정치인까지 단골 점집 있을 정도  

['사주'보고 신입 뽑는 기업]

M&A 등 굵직한 사업 앞두고 시기 문의

파트너 기업 오너와 사주 맞는지도 확인 

['점괘'로 위로받는 보통사람들]

일상에 대한 고민 들어주고 조언도 받아

"힘들어 말라는 얘기에 울음 터트리기도"

3015A02 점


# 야권 중진인 A 의원은 새 의원실을 배정받을 때마다 역술인에게 도움을 구한다. 역술인은 이사 날짜부터 어떤 숫자가 들어간 방을 배정받아야 하는지까지 세심하게 조언한다. 20대 국회에서도 A 의원은 역술인의 조언대로 의원실에 짐을 넣는 순서와 가장 먼저 입장해야 하는 보좌진의 연령대 등을 지켜가며 이사를 마쳤다.

# 서울 동대문에서 의류도매업을 하는 김시우(32) 대표는 옆 매장 대표의 소개로 쌍문동의 점집을 찾았다.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용하다고 유명한 곳이었다. 김 대표는 “경기가 좋지 않아 내년 사업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는데 점집에서 상담을 받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서 ‘점(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주요 시험을 앞뒀거나 취업을 준비할 때, 결혼하고 싶은 상대가 생겼을 때, 아이가 태어났을 때 등 사람들은 인생의 주요 시점마다 점집을 찾는다. 정치·경제계에서도 역술인들은 ‘음지의 조언자’ 역할을 한다. 정치인들은 선거철에 진로를 묻고 경영인들은 새로운 사업을 해야 할지에 대해 조언을 구한다. 점은 이렇게 누군가에게는 조언자로, 누군가에게는 상담가로 삶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주요 정치의 굴곡 뒤에는 ‘점’이 있었다=많은 이들이 점집으로 향하는 발길을 끊지 못하는 이유로 ‘불안정성’을 꼽는다. 4년마다 치열한 공천과 선거를 거쳐야 하는데다 당선된 후에도 권력의 향방에 따라 운명이 갈리는 정치인들은 불안정성이 큰 직업 중 하나다. 이 때문에 정치인들은 역술인에게 미래를 묻고 조언을 얻는다. 야권의 한 보좌관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의원이 점을 본다”며 “기독교 신자까지 단골 점집이 있을 정도”라고 밝혔다.

주요 정치사에서 점은 야사(野史)처럼 떠돈다. 백운학이라는 역술인이 지난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난 뒤 5·16군사정변의 성공과 박 전 대통령의 죽음을 예언한 일화는 정계에서 유명하다.

제16대 대선에서는 이른바 ‘차떼기’ 등 불법 대선자금 모집과 관련, 한 정치인이 구속을 막기 위해 유명 무속인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당시 무속인의 지시대로 큰 가물치를 의원실까지 가지고 들어와 의식을 치르고 다시 방생했지만 구속은 피할 수 없었다.

올해 19대 대선에서도 한 대선주자가 수도권의 성명학 보는 곳으로 보좌진을 보내 출마 여부를 물었지만 가족 문제가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답을 얻었다.

◇경영에 역술을 더한 기업인들=경제계에서도 예측하기 힘든 기업 운영에 역술인의 조언을 더해 안정성을 얻으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 회장이 신입사원을 뽑을 때 역술인의 조언을 듣는다는 설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삼성의 성장과 연계돼 회자된다.


연매출 1,000억원 규모의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B 대표 역시 임원을 새로 뽑거나 주요 보직에 팀장급을 앉힐 때는 반드시 단골 점집을 찾는다. 1989년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인연을 맺은 경기 일산의 무속인에게 자신과 사주가 맞는지를 따져본 뒤 최종 인사 결정을 내리는 식이다. 인수합병(M&A) 등 주요 의사 결정을 할 때도 인수 대상 기업 대표의 생년월일을 들고 일산 점집을 찾아 문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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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대표는 “회사의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한낱 점집에 의존한다는 비아냥도 듣지만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무탈하게 사업을 했다고 믿는다”라며 “적어도 나와 사주가 맞는 사람, 맞지 않는 사람, 그 자리에 맞는 사람과 아닌 사람을 걸러내는 역할은 톡톡히 한다”고 자신했다.

대구에서 섬유업체를 운영하는 C 대표는 아예 역학 공부를 독학으로 마쳤다. C 대표는 사업이 잘 되지 않거나 새로운 바이어를 소개받을 때마다 사주풀이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스스로 운을 점친다.

C 대표는 “어릴 적부터 부친이 찾던 용한 무속인을 자주 따라가서 들었는데 주요 사건이나 변화를 정확하게 맞히는 것을 보고 놀랐다”며 “역학도 과학과 마찬가지라 제대로 풀이만 할 줄 알면 된다”고 강조했다.

◇일상 속 ‘점’으로 삶을 위로하는 사람들=점집을 즐겨 찾는 이들은 누군가 자신의 상황을 듣고 조언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고 한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이혜선(46)씨는 “너무 사주에 빠져 산다는 얘기를 듣지만 세상살이 자체가 불확실한 상태에서 누군가와 내 삶을 주제로 깊이 있게 얘기를 나눈다는 것이 적지 않은 용기를 준다”고 말했다.

올해 초 신년 운세를 보기 위해 점집을 방문했던 직장인 D씨도 “집안의 장녀이고 여기저기 치이겠지만 다들 어려운 점이 있으니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는 얘기를 듣고 나도 모르게 그 앞에서 울어버린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다만 역술이 조언의 영역을 넘어 삶을 조종하는 수준까지 이르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는 있다.

직장인 E씨는 “대학 선배가 스스로 사주풀이를 하면서 몇 년 뒤 시험에 붙을 운명이니 당장은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적이 있어 어이가 없었다”며 “맹목적으로 믿을 바에야 차라리 미래를 모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권경원·정민정기자 nahere@sedaily.com

권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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