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국내 사건·사고는 인재(人災), 갑(甲)질, 십대(十代), 젠더(性) 네 가지 키워드로 요약된다. 장소를 불문한 대형 사고의 원인은 안전불감증에서 비롯됐다. 부산 여중생 폭행사건은 청소년 범죄에 대한 사회 인식을 바꿔놓았고 운전기사 폭로로 드러난 ‘갑질’은 수면 아래 있던 사회 병폐를 끌어내는 계기가 됐다. 리벤지 포르노로 촉발된 디지털 성범죄는 남녀 갈등으로 이어졌다. 올 한 해를 뒤흔든 주요 사건·사고를 키워드별로 살펴본다.
◇안전불감증이 낳은 인재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불감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올해도 소중한 생명을 앗아간 대형 안전사고가 쉴 새 없이 터졌다. 50여명의 사상자를 낳은 화성 동탄 메타폴리스 화재, 15명이 사망한 영흥도 낚시어선 침몰, 평택 타워크레인 사고 등이 대표적이다. 모두 경제적인 이유로 안전관리를 소홀히 하거나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 하는 안전불감증이 낳은 대표적인 인재다. 최근 발생한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사망 사건과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역시 경찰 등에서 정확한 사고 경위를 수사하고 있지만 비상구 폐쇄, 점검 소홀, 관리 부실 등 이미 드러난 사실만 봐도 전형적인 인재라는 데 이견이 없다.
전문가들은 안전사고가 잇따라 터지면서 시민들이 오히려 안전 문제에 무뎌지는 역설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낳는 안전사고가 수차례 발생해 웬만한 사고로는 시민들이 별다른 관심조차 갖지 않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지적이다. 관리 감독 강화 등 정부의 대책도 중요하지만 결국 사회 구성원 모두가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갖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폭로로 대응한 ‘乙’의 반란
올해도 어김없이 사회 각계각층에서 상식을 뛰어넘는 갑질이 대중을 분노케 했다. 기업인의 ‘권력형 갑질’은 여전했다. 전 호식이두마리치킨 회장은 지난 6월 서울 청담동의 한 일식집에서 20대 여직원과 식사하다 부적절한 신체접촉으로 물의를 빚었다. 8월에는 운전기사에게 상습 폭언을 한 녹음파일이 공개돼 한 제약사 회장이 구설에 올랐다. 녹음파일에는 회장이 운전기사에게 “이 XX야, 아이 XXXX”라며 욕설한 내용이 담겼다.
의료계와 학계 등 사회 전반에서 오랫동안 갑질에 시달리던 을(乙)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부산대병원과 전북대병원 등 대학병원에서는 교수 갑질을 견디지 못한 전공의의 폭로가 이어졌다. 한림대성심병원 간호사들은 재단 행사 장기자랑에서 선정적인 춤을 추도록 한 사실을 폭로했다. 대학가도 교수 갑질로 홍역을 앓았다. 견디지 못한 대학원생이 폭발물을 전달해 지도교수를 다치게 한 ‘연세대 텀블러’ 사건으로 교수들의 갑질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을의 폭로는 촛불 정국을 거치면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촛불집회 당시 광장에는 정치적 어젠다뿐 아니라 갑질 등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병폐를 해소하자는 요구가 잇따랐다.
◇흉포해진 10대…소년법 논란
10대 강력사건의 잔혹성과 흉포성이 어느 해보다 도드라졌다. 올 3월 ‘인천 초등생 살인사건’ 10대 피의자들은 8세 여아를 집으로 유인해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한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던졌다. 9월 ‘부산 여중생 집단폭행 사건’에서 가해자들은 옷이 찢어진 채 피투성이가 된 피해자의 사진을 공유하면서 사회적 공분을 샀다. 추석 연휴에 불거진 ‘이영학 사건’에서 이영학씨는 여중생 딸의 친구를 집으로 유인한 뒤 수면제를 먹여 성추행한 뒤 살해해 시신을 유기했다. 사건의 참혹함에 많은 시민이 분노했지만 이씨 여중생 딸이 사건에 공모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더 큰 충격을 줬다.
단순한 일탈 수준을 넘은 10대 강력사건이 잇따르자 나이가 어려도 정당한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부산 여중생 집단폭행 사건이 불거지자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소년법 폐지 관련 국민청원이 쇄도했다. 현행법은 중범죄라 해도 만 18세 미만인 소년에 대해 최대 15년의 유기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처벌 강도가 범죄 잔혹성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10대 강력사건이 갈수록 잔혹성을 띠면서 10대에 대한 시민들의 법감정이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서 “하지만 소년범들을 포용하는 사회적 인식과 계도 시스템 등 제도적 개선 없이 형량만 높이는 것에는 10대 강력사건 근절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SNS와 만나 폭발한 젠더 이슈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젠더 이슈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꾸준히 오르내렸다. 7월 한 남성이 트럭으로 여자친구를 쳐 이를 부러뜨린 사건이 보도되면서 데이트폭력과 젠더폭력 이슈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SNS를 중심으로 확산된 여론은 젠더폭력 범부처 종합대책과 불법 성행위 영상 삭제비용 국가지원법 발의로까지 이어졌다. 디지털성범죄아웃(DSO)과 같은 여성단체들도 SNS를 활용해 몰카, 나체 사진 불법 합성, 성행위 동영상 유포 등 신종 성희롱 범죄를 적극 알렸다.
SNS는 한샘·현대카드 등 대기업 내 성폭력 사건을 폭로하는 데도 역할을 톡톡히 했다. 피해자들이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게시글은 하루 만에 댓글 10만개를 기록하며 누리꾼들 간 진실공방으로 번졌다. 과거 자신이 겪은 피해사례를 폭로하며 피해자를 지지하는 ‘미투’ 캠페인도 영화계와 문학계에 퍼졌다.
생활 속 젠더 이슈인 여성 생리대 가격 및 위생 논쟁과 낙태 합법화 논쟁도 SNS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낙태죄 폐지 청원이 20만명을 돌파하자 “국가와 남성의 책임이 빠진 게 맞다”며 임신중절 실태조사를 벌이겠다고 약속했다. 여성단체들은 “불법 낙인 때문에 수술 후유증에도 병원을 찾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실질적 대책을 마련해주기를 기대한다”고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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