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에는 합(合)과 협(協)을 강조했는데 올해는 이를 뛰어넘어 ‘화(和)’를 소망한다. 마음부터 열려야 화합과 협업이 싹트고 기술혁신 생태계에도 융합의 바람이 불지 않겠는가. 마침 여의도에도 협치의 손길이 오간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희망을 기대해봄직한 새해 아침이다.
올해는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이 되는 해다. 15세기에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나라를 만든 세종은 탁월한 국가 경영자이자 혁신가로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다. 세종의 최대 업적인 한글 창제와 인쇄술의 발전은 상승작용을 일으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전환기의 동인이 됐다. 지식이 소수 권력층으로부터 백성에게 전수됨에 따라 조선이 과학기술 강국을 넘어 문화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아울러 세종은 오랫동안 지배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시간’을 백성과 공유함으로써 앞날을 가늠할 수 있는 인간다움을 찾아준 성군이었다. 시계를 만들어 백성에게 보급하는 것은 그 자체가 혁신적인 활동이었기에 조선의 과학기술과 문명의 발전 수준이 높아진 것은 당연하다. 시간은 인간 활동의 문화적 척도이자 인문적 사고체계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이는 세종이 혁신 생태계의 작동 원리를 제대로 알고 있었던 군주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백성으로부터 현안과 수요를 파악하고 경연(經筵)을 통해 대신들과 소통하고 토론함으로써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회의를 전략적으로 운영했다. 일단 해결해야 할 과제와 해법이 정해지면 이를 실행에 옮기는 일은 이해도와 신뢰가 높은 책사나 집현전 학사들의 몫이었다.
역사에는 ‘만약(if)’이 없다지만 세종시대에 노벨상이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일본의 과학사학자 이토 야마타는 ‘과학기술사 사전’에서 “15세기에 노벨상이 있었다면 조선이 가장 많은 상을 받았을 것”이라고 서술했다. 당시 세계 최첨단 기술 가운데 47%에 해당하는 29건이 세종 치하 조선의 기술이었으며 최강대국이었던 중국이 5건, 나머지 국가를 모두 합쳐도 28건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괄목할 만하다. 이렇듯 세종은 합과 협, 그리고 화를 통해 백성의 고통과 사회 문제를 해결했던 혁신형 지도자였기에 성군으로 칭송받는 게 아닐까.
지난 연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에서 주관한 ‘2017년 과학기술 10대 뉴스’ 선정 과정에 참여하면서 국민이 과학기술계에 무엇을 원하는지 성찰해볼 수 있었다. 여섯 가지 연구성과에는 사회문제 해결에 대한 꿈과 기대감이 드러났지만 정책과 관련이 높은 네 가지 이슈에는 불안감과 위기감이 묻어나 있었다. 과학기술정책이 국민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사회적 소통에 적극적이고 혁신의 잠재력을 갖춤으로써 전문가와의 간극을 좁혀나가고 있지만 정책으로 희망을 노래하기에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과학기술로 조선의 새 시대를 열었던 세종, 그가 성군으로서 첫걸음을 내디뎠던 무술년처럼 새해도 과학기술과 혁신으로 융성의 발판을 삼는 ‘2018 코리아+’의 첫걸음이 되기를 바란다.
임기철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