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해외칼럼] 우리 시대의 거대 담론

파리드 자카리아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CNN ‘GPS’ 호스트

美 글로벌 리더십 약해지면서

세계질서 변화 급속도로 진행

무기 경쟁·군사충돌 위험 커져

파리드 자카리아파리드 자카리아


인간의 동기화에 대한 이론을 새롭게 틀 지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이 일찍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누구도 단지 수치만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스토리를 필요로 한다.”

개인뿐 아니라 국가도 스토리를 필요로 하기는 마찬가지다. 국가들 역시 시대의 거대한 국제적 담론 안에서 나아갈 방향을 잡는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글로벌 스토리는 무엇인가.

지난 수십 년간 가장 중요한 내러티브는 냉전이었다. 거의 모든 국가가 냉전이라는 이념적·정치적·군사적 투쟁이라는 맥락에서 행동하고 반응했다.

지난 1989년 공산주의가 붕괴된 후 20여년 동안 지구촌의 문호 개방, 즉 세계화(globalization)가 시대적 담화의 본류를 이뤘다. 국가들은 새로운 시장으로 떠오르기 위해 법석을 떨었고 미국의 국력과 위세를 등에 업은 민주적 서구 자본주의가 거부할 수 없는 대세를 이뤘다.

이어 9·11은 세계화라는 시대적 스토리에 일대 타격을 가했고 잠시 동안 이슬람 테러가 역사의 추이를 조종하는 듯했다. 그러나 테러리즘은 지구촌의 거대 담론을 지배하기에는 지나치게 약하고 제한적인 힘이었음이 입증됐다.

그러면 지금의 글로벌 스토리는 무엇인가. 내 생각으로는 미국의 영향력 쇠퇴가 지구촌의 최대 트렌드다.

미국은 경제적·군사적으로 여전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힘(power)을 유지하고 있으나 그 힘을 이용해 세계를 모양 지으려는 의욕과 역량은 쇠퇴하고 있다.

현 행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를 비롯해 미국이 성취한 위대한 업적을 애써 해체하려 들거나 글로벌 어젠다를 정하는 데 아예 무관심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취임 첫해 미국을 방문한 외국의 정상을 위해 단 한 차례의 국빈만찬도 주재하지 않은 첫 번째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잠식돼가는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은 이미 다른 국가들의 발 빠른 적응을 유발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초 지그마어 가브리엘 독일 외무장관은 “현재 서방세계는 물론 지구촌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서구적 영향력에 의존한 다자주의(multilateralism)의 든든한 보증인으로 미국의 역할이 트럼프 행정부 아래에서 후퇴하고 있는 데서 비롯됐다”고 적시했다.


그는 이어 미국의 역할 변화가 “세계질서의 재편을 가속화하고 무역전쟁, 무기 경쟁과 군사적 충돌 등의 위험을 증가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관련기사



가브리엘 장관은 유럽이 거의 실존적 상황에 처해 있다고 덧붙였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래 유럽은 명명백백히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미국의 현 행정부는 유럽과 거리를 두고 있으며 이전의 파트너를 경쟁국이나 심지어 경제적 적대국 정도로 간주한다.”

가브리엘 장관은 유럽이 그들의 운명을 자신의 손으로 결정해야 하며 미국의 대외정책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크리스티나 프릴랜드 캐나다 외무장관도 2017년 6월 연설에서 “장장 70년간 세계질서를 이끌어온 미국에 감사한다”면서 “트럼프 행정부 아래에서 국제질서 유지를 위한 미국의 지도력은 끝장이 났다”고 쓴소리했다.

한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해 10월 제19차 중국 공산당대표회의에서 새로운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 연설을 했다. 그는 “중국의 국제적 지위가 전례 없이 상승했다”며 “우리는 현대화를 달성하고자 노력하는 다른 개발도상국들을 위해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시 주석은 “중국이 세계의 중앙무대에 바짝 다가서고 인류에게 크게 공헌하는 모습을 보게 될 새로운 시대”를 약속했다. 그전의 연설문에서도 시 주석은 중국이 세계 무역질서의 새로운 보증인이 될 것이라는 대담한 선언을 내놓았다.

이제 이것이 우리 시대의 글로벌 스토리다.

기존 세계질서의 창조자이자 후원자이며 집행자인 미국은 자기중심적인 고립 속으로 뒷걸음질치고 있다.

공개적이고 룰에 입각한 세계의 또 다른 지지자이자 후원자인 유럽은 세계무대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할 만한 분명한 비전이나 목적을 결여하고 있으며 온통 구대륙의 자체적 프로젝트인 유럽연합(EU)의 명운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힘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터키·러시아·이란·사우디아라비아 등 일군의 진보적 국가들이 각국이 속한 권역에서 기세를 올리고 있으나 시대적 거대 담론의 다음 장(chapter)을 결정지을 힘과 전략적 위용을 갖춘 국가는 중국이 유일하다.

10년 전 나는 ‘흔들리는 세계의 축(Post-American World)’이라는 책에서 미국의 몰락이 아니라 나머지 국가들의 부상을 이야기했다.

당시 내가 제시한 다른 국가들의 번영은 이미 현실화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질서의 변화는 70여년에 걸쳐 쌓아올린 미국의 글로벌 영향력을 스스로 포기한 트럼프 행정부의 어리석고 자기 패배적인 결정을 통해 극적으로 가속화하고 있다. 조만간 대통령이 “오호통재라(sad)!”라는 트윗을 날리게 될지도 모른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