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정여울의 언어정담] 잘못쓰기, 또는 시적 허용의 아름다움

작가

어긋난 맞춤법과 틀린 표현

글 속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간절함 증폭의 변주되기도

정여울 작가정여울 작가


가끔씩 틀린 맞춤법이나 어긋난 문법이 뜻밖의 깨달음을 줄 때가 있다. ‘설레임’이라는 아이스크림 이름은 틀린 맞춤법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어쩐지 ‘설렘’보다는 ‘설레임’의 어감이 애틋하다. 내가 일부러 설레고픈 것이 아니라 ‘설레임’을 나 스스로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그 감정은 통제할 수 없는 것, 어쩔 수 없음의 영역이 아닐까. “행복하자” “아프지 말자”는 말도 어법상 어긋나지만 말하는 이의 간절함이 그 불가능한 청유형 속에 깃들어 있다. 형용사로 청유형이나 명령형 문장을 만들지 않는다는 규칙은 너무 억압적인 것이 아닌가. 때로는 ‘슬퍼하지 말아요’라는 올바른 문장보다 ‘슬프지 말아요’라는 어긋난 문장 속에 진심을 소담스럽게 담아내고 싶어진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사뿐히 즈려밟고 가소서”가 아니라 “지르밟다”라는 표준어를 썼다면 과연 그 느낌이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즈려밟다’만의 안타깝고 무참한 시적 울림은 결코 올바른 문법의 표현, ‘지르밟다’가 대체할 수 없는 시적 허용의 아름다움이다.



천양희 시인의 ‘바다 보아라’를 읽다가 가끔씩 나에게 보내는 문자메시지에서 맞춤법을 틀리게 쓰시는 우리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컥 하는 그리움이 밀려왔다. “자식들에게 바치느라/생의 받침도 놓쳐버린/ 어머니 밤늦도록/ 편지 한 장 쓰신다/‘바다 보아라’ /받아보다가 바라보다가//바닥없는 바다이신/받침 없는 바다이신//어머니 고개를 숙이고 밤늦도록/ 편지 한 장 보내신다/‘바다 보아라’/정말 바다가 보고 싶다” 이 시를 읽다 보면 ‘받아보아라’를 ‘바다보아라’고 잘못 쓰신 시인의 어머니가 우리 어머니처럼 정겹게 느껴진다. ‘바다 보아라’라는 틀린 맞춤법이 오히려 시인으로 하여금 바다를 뛰어넘는 깊이와 넓이로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를 생각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이 시에서 어머니의 틀린 맞춤법은 실수나 무지가 아니라 해맑은 순수의 영롱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우리 어머니도 딸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낼 때마다 많은 어려움을 겪으신다. 황반변성을 오랫동안 앓아 오신 내 어머니는 낮에도 눈이 침침하고 사물이 흐릿하게 얼룩지는 고통을 느끼신다. 그래도 딸들에게 문자메시지 한 통이라도 더 보내려고 돋보기를 더듬더듬 찾아 끼고 정성들여 문자메시지를 빚어내는 우리 어머니. 나는 한 번도 어머니의 틀린 맞춤법을 타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완벽한 문장이 도착하면 괜히 서운하고 재미없게 느껴질 정도로, 엄마의 틀린 맞춤법은 정겹고 그리운 ‘울엄마’의 트레이드마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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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공식적인 글쓰기에서 밥 먹듯 시적 허용이나 틀린 맞춤법을 용인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때로는 더 창조적일 수도 있고 때로는 더 아름다울 수 있는 언어의 자유로운 흘러넘침을 지나치게 가로막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때로는 비표준어와 표준어의 경계를 다시 묻게 만드는 단어도 있다. ‘잊혀지다’는 사전에서 “‘잊히다’의 비표준어”로 등록되어 있다. 하지만 ‘잊히다’가 아니라 꼭 ‘잊혀지다’라는 표현을 써야 어울릴 것 같은 경우가 있다. ‘잊히지 않는 추억들’보다는 ‘잊혀지지 않는 추억들’이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잊히다’는 ‘잊다’의 수동태이지만 ‘잊혀지다’는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망각되는 것이 아닐까. ‘잊다’의 수동태일 때는 ‘잊히다’를 쓰고, 서서히 조금씩 기억이 사라지는 경우는 ‘잊혀지다’를 허용해줌이 어떨까. 문법이나 맞춤법은 물론 중요하지만 가끔은 이런 언어의 정해진 율법을 뛰어넘는 과감한 언어의 질주, 춤추듯 자연스럽게 덩실덩실 펼쳐지는 언어가 그리워진다. ‘이건 맞고 저건 틀리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건 왜 맞는 거지?’ ‘저건 정말 틀린 걸까?’하고 끊임없이 질문할 줄 아는 열린 마음을 간직하고 싶다. 마침내 구성진 사투리도 해학이 넘치는 시적 허용도 언제든지 남의 눈치 안 보고 자유롭게 구사하는 사람들이 넘쳐났으면. 우리말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혹한 언어의 재판관이 아니라 아름다운 시적 허용의 사례를 밤새도록 끝없이 읊을 수 있는 낭만과 열정을 지닌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 신조어나 유행어에 골몰하며 ‘난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굳이 시인이 아니더라도 더 풍요롭고 더 아름다운 언어의 눈부신 가능성을 일상 속에서 실험하는 아름다운 언어의 동지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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