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3년 세종 5년 조선통보라는 금속화폐를 저화(楮貨)라는 지폐의 보조화폐로 같이 쓰도록 하며 조선 사회는 술렁인다. “물물교환을 하면 벌금형을 매기고 심지어 곤장도 때리고 가산까지 몰수할 수도 있다”며 강제한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민심이 흉흉해지고 상거래도 침체하자 세종은 금속화폐 도입 20여년 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996년 고려 성종 때 ‘건원중보’가 만들어졌으나 흐지부지됐고 세종의 부왕인 태종도 금속화폐를 쓰려고 했으나 실패했던 터였다.
세종은 ‘화폐경제를 정착해 백성이 편리하게 물건을 사고 세금도 내고 상공업 등 경제도 진흥시키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국가재정을 확충하는 길이기도 했다. 조선 개국 1년 전인 1391년에 나온 저화도 실상 권문세가의 힘을 약화시키고 개국세력의 재정기반을 만들려는 목적도 있었다. 1418년부터 32년 치세를 통해 ‘훈민정음(訓民正音·한글)’을 만들어 백성을 교화하고, ‘과학기술 르네상스(“15세기 노벨상이 있었다면 조선이 가장 많은 상을 받았을 것”-일본 과학사학자 이토 야마타)’ 시대를 열고, 오늘날 한반도 국경이 되는 4군 6진을 개척하고 왜구의 온상인 대마도 정벌에 나섰던 그로서는 화폐경제를 통한 부국강병을 염두에 뒀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사회로 국내외 상거래나 무역이 활성화돼 있지 않아 화폐경제가 정착되기 힘들었다. 세금도 쌀이나 포(布·베)·특산품으로 거뒀고 관리의 녹봉도 쌀과 옷감으로 지급하던 때였다. 상품화폐나 물물교환 시대로 저화가 일부 사용됐으나 가치는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1980년대까지도 시골에서 부모님이 논·밭이나 집을 거래할 때 쌀을 화폐처럼 썼던 것을 보면 세종이 아무리 혁신가라 해도 화폐경제를 정착시키기 얼마나 어려웠을지 짐작이 간다.
결국 화폐개혁은 실패로 돌아갔고 17세기 상평통보가 나오기 전까지 다시 물물교환이나 상품화폐 시대가 이어졌다. 화폐개혁 실패를 교훈 삼아 이후 토지의 공평과세를 추진할 때 세계최초로 전국 여론조사(17만2,806명 참가)까지 실시하며 10년 넘게 공론화를 거쳐 단계 실시했던 세종이기에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만약 당시 화폐경제가 정착했다면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올해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을 맞아 공적을 계승하기도 모자란 판에 굳이 ‘옥에 티’를 꺼낸 것은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암호화폐)의 투기·버블 논란이 한참 진행된 뒤에야 정부가 ‘거래소를 폐쇄하네 마네’ 등 뒷북을 치며 우왕좌왕하기 때문이다. ‘가상화폐는 줄기고 블록체인은 뿌리’라는 옹호론자와 ‘가상화폐와 블록체인은 분리 가능하다’는 규제론자의 공방 속에 중심을 못 잡고 있다. 분명한 것은 가상화폐는 4차 산업혁명의 인프라 중 하나인 블록체인 기술에서 나왔고 블록체인은 금융·물류 등 산업이나 생활 속에 속속 적용되는 추세로 적극 육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지난해 4월 일본이 가상화폐거래소를 금융청 인가를 받도록 하며 평균 15%가량의 과세근거를 마련했고 중국은 지난해 9월 거래소를 폐쇄하는 등 논란이 뜨거웠지만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다. 코스닥시장보다 더 거래가 많은 가상화폐거래소가 규제 사각지대에서 통신사업자로 신고만 하면 된다는 것은 난센스다. 돈의 꼬리표도 추적이 안 돼 20~30대 소액자금 외에도 각종 지하 불법·탈법자금을 불러와 외국보다 평균 30% 이상 비트코인 값이 비싼 ‘김치 프리미엄’이 형성됐는데도 세금 한 푼 걷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2009년 개당 0.1센트(10원)에서 시작했던 비트코인이 지난해 초 100만원에서 최근 한때 2,500만원까지 폭등하고 1,400여 가상화폐가 나왔는데도 말이다. 세종대왕이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 볼지 자못 궁금하다. /kbg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