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배우들에게는 그런 작품이 있다. 머리에 하얀 눈이 내린 듯 세월의 흔적이 뚜렷해지면 욕심내보고 싶은 작품. 객석 멀리서도 눈에 띄는 주름이 패면 그 자체로 욕심내볼 자격은 갖췄다 싶은 작품. 지난 2011년 백성희장민호극장 개관을 기념해 초연한 연극 ‘3월의 눈’이 그렇다.
손자를 위해 평생 일궈온 삶의 터전이자 마지막 재산인 한옥을 팔고 떠날 채비를 하는 장오와 그 곁을 지키는 죽은 아내 이순의 하루를 가만히 비추는 이 작품을, 손진책 연출은 ‘생성과 소멸에 대한 헌사’라고 했다. 인생을 뒤엎을 듯 쏟아진 폭설도 하루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3월의 눈처럼 배우들의 연기는 애잔하되 담담해야 하고 연기하되 연기하지 않아야 한다. 그만큼 연륜 있는 배우의 내공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3년 만에 돌아온 이 작품에는 초연 당시 국립극단의 원로배우 고(故) 장민호(1924~2012), 고(故) 백성희(1924~2016)와 함께 무대에 올랐던 오영수(74)가 TV드라마에서 주로 활동했던 배우 정영숙(71)과 부부로 호흡을 맞춘다. 몇 해 전 오영수가 ‘이순 역에 정영숙이 좋을 것 같다’고 한 것을 손 연출은 넘겨듣지 않았다.
장오役 오영수
“7년전 故 장민호 선생과 함께했던 작품
무대서 모든 에너지 쏟아붓는 모습 선해
연기가 아닌듯이 인생 담아 장오될 것”
1일 서울 용산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만난 오영수는 “그때 왜 정영숙을 떠올렸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함께 호흡을 맞추고 보니 내 생각이 정확했더라”며 “정영숙은 지금까지 다른 배우들이 연기한 이순과는 또 다른 이순”이라고 소개했다. 그러자 정영숙은 “연기를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려면 조금 더 세월이 흘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도 있다”며 “하지만 장오가 기억하고 싶은 이순은 조금은 젊었던 시절의 이순이라고 해석하니 좀 더 자연스럽게 역할을 소화할 수 있겠더라”고 귀띔했다.
7년 전 장민호 선생과 더블캐스팅돼 무대에 섰던 오영수는 지금도 연기를 하다 보면 무대 위 장 선생의 모습이 선하다고 했다.
“지금도 손 연출은 연기를 하지 말라고 해요. 장 선생이 연기했던 장오가 연출의 머릿속에 각인된 거지. 근데 지금도 생각해보면 연기를 안 한 게 아니야. 연기를 하면서도 하지 않는 듯 보인 게 진짜 내공이지. 그 당시 폐가 벌집처럼 구멍이 나서 혼자 힘으로 서 있기도 힘들었는데 무대에 나가서 대사 한 자 틀리지 않고 연기를 합디다. 그런데 무대 뒤에서는 내 어깨를 부여잡고 한참을 숨을 고르지 않으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어요. 관객 앞에서 에너지를 다 쏟고 온 거죠. 그 모습을 보며 인간에게는 초인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공연이 끝나고 곧장 입원하더니 6개월 뒤 세상을 떠나더라고. 무대에 설 수 없는 상태인데도 끝까지 연기를 놓지 않았던거야.”(오영수)
이순役 정영숙
“조금은 젊었던 시절 이순이라 해석하니
좀 더 자연스럽게 역할 소화할수 있어
청년 배우들과 호흡, 정말 뜻깊은 무대”
7년이 흘러 오영수는 70대가 됐고 주름도 더욱 깊어졌다. 장오를 연기하는 그의 마음도 사뭇 달라졌다.
“70대가 되니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좋아요. 요즘 내 고민은 어떻게 하면 인생을 추접스럽지 않게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을까인데 요즘은 장오를 연기하며 많은 생각을 해. 경제적인 문제로 손자를 위해 집을 팔게 됐지만 ‘그런 것이 인생이다’하고 감내하는 장오처럼 생각하는 거죠.”
‘3월의 눈’은 요즘 연극에서 보기 드물게 신구의 조화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오영수와 정영숙, 원로배우 오현경과 손숙이 장오-이순 역으로 호흡을 맞추는 데 이어 연기력으로 정평이 난 하성광과 올해부터 국립극단의 시즌 단원으로 활동하게 된 청년 배우 8명이 함께 무대에 오른다. 정영숙은 “젊은 배우들이 연습하는 모습만 봐도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다”며 “지금 함께 무대에 오르는 젊은 배우들이 장오와 이순을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국립극단이니까 이렇게 다양한 연령대가 한 무대에 오르는 거지, 대학로만 해도 장년층 배우가 설 수 있는 무대가 많지 않아요. 연극 ‘고모를 찾습니다’에서 호흡을 맞췄던 하성광씨를 비롯해 좋은 배우들이 많이 나오는데 연습할 때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들 중에 미래의 장오, 미래의 이순이 보이거든요. 그 무대를 볼 수 있다면 정말 뜻깊을 것 같아요.”
오영수도 “이렇게 나이 많은 선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좋은 가르침이 될 것”이라며 “연극에 인생을 담아내는 법을 배웠으면 한다”고 거들었다.
앞서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세 차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한 차례 공연됐던 ‘3월의 눈’은 이번에 처음으로 명동예술극장 무대에서 관객을 만난다. 매번 3월 초 개막했던 공연이 이번에는 한 달을 당겨 다음달 7일 개막한다. 오는 3월11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