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청와대에서 열린 ‘장차관 워크숍’. 행사시간은 오후2시부터 7시였지만 당초 계획보다 훨씬 늦은 오후8시가 지나서야 끝났다. 이날 문재인 대통령은 “공무원이 혁신의 주체가 되지 못하면 혁신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장차관들도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다. 예전같이 관료사회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 차관급 인사는 “예전 같으면 과장이 처리했을 일을 요새는 차관에게 가져와 어떻게 할지를 묻는다”며 “권한도 줄었지만 책임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유가 뭘까. 현장 관료들은 문재인 정부 들어 9년 전 일까지 들추면서 적폐청산에 나선 데 대해 불안감을 갖고 있다. 인사 문제를 비롯해 해외자원개발·세무조사까지 논란이 됐던 일들이 정권 차원에서 재검증받는 것을 본 관료들은 ‘청와대가 지시한 것도 탈이 나면 (책임을) 뒤집어씌우지 않느냐. 책임질 일을 하면 안 된다’는 인식이 강해졌다. 또 검찰이 지난 정부를 대상으로 전방위 수사를 벌이면서 실무진을 포함해 고위공무원이 불안해하고 있다. 앞서 장관 1순위라는 평가를 받았던 최상목 전 기획재정부 1차관은 최순실 사건으로 타격을 받고 공직을 떠났다. 안종범 전 경제수석을 비롯해 상당수 인사들도 재판을 받고 있다.
산업부 서기관과 A국장의 구속은 이 같은 생각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산업부 내부에서는 실무진에 책임을 묻는 것은 문제라는 의견을 청와대에 전달하려 했지만 검찰에 관여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강해 속앓이만 하고 있다.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까지 운영했던 국세청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 때문에 “승진 생각할 필요 없이 오래 근무하는 게 낫다”거나 “차라리 그만두는 게 좋다”는 반응이 나온다.
특히 정권이 바뀌면 현재 하고 있는 정책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공무원들은 노심초사하고 있다. 탈원전과 조선업 구조조정이 대표적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탈원전의 경우 정부가 바뀌면 어떤 식으로든 궤도가 수정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문재인 정부에서 이를 담당했던 공무원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느냐”고 하소연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문재인 정부 출범 9개월이 돼가지만 공공기관 인사도 정리가 안 되고 있다. 관가에서는 공공기관장에게 물러나라는 취지를 전하면 “공문을 보내달라”거나 “청와대 누구 지시인지 밝히라”는 요구에 손을 놓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같은 맥락에서 정치적 이유로 내려온 이들이 많은 상근감사는 손조차 대지 못하고 있다.
관료들의 사기는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최저임금 혼란 수습에 실·국장까지 동원되고 있다. 청와대의 요구가 밑에까지 내려오는 셈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업체들도 바쁜데 실·국장이 나가봤자 민원만 쏟아진다”며 “처음부터 방향을 정해놓고 추진한 정책에 문제가 생기니 공무원을 동원해 뒷수습하는 데 질렸다”고 토로했다.
정체성도 흔들린다. 문 대통령은 “아직도 일자리는 민간이 만든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며 관료들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며 시장을 중시하는 관료들의 생각은 다르다. 소득주도성장부터 청년 일자리, 최저임금까지 소신과 다른 정책을 해야 하니 어려움이 많다. 이뿐만이 아니다. 재정 건전성을 중시했던 예산 라인은 정권 초 적폐세력으로 몰렸고 산업부는 원전과 대기업 정책 문제로 청와대의 불신을 받았다.
새 정부 들어 힘이 세진 공정거래위원회 공무원들도 헷갈릴 때가 적지 않다. 지난해 7월 김상조 위원장은 일자리 창출이 공정위의 가장 중요한 정책과제라고 밝혔다. 이를 두고 부처의 존재 목적과 본질까지 뒤죽박죽 섞이고 있다는 목소리가 내부에서 나왔다.
정권 초라 눈치를 봐야 하는 경우도 많다. 공적인 성격이 강한 한국은행은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고용 감소가 불가피하다고 보면서도 이를 외부에 밝히지 않는다. 내부적으로는 고용 1만~2만명 감소로 보지만 공식적으로는 해당 숫자를 내놓지 않고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지금 속도대로 가면 장기적으로 고용 감소 부작용이 상당할 수 있다”며 “일자리라는 게 왜 안 늘어나느냐고 야단친다고 늘릴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물론 큰 줄기에서는 공직에 대한 매력이 떨어졌다. 연금개혁으로 부처 사무관과 서기관들 사이에서는 “개인연금을 별도로 알아봐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세종시 이전과 재취업 제한 강화, 세월호 사건 때 불거진 ‘관피아’ 논란도 자존감을 떨어뜨렸다. 과거에는 행정고시를 통과한 뒤 장차관으로 입신양명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감옥에 갈 일을 만드느니 복지부동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관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전직 장관 출신 인사는 “관료는 정권의 손과 발이고 청와대는 머리”라며 “손발을 제대로 쓰지 못하면 정책 목표도 달성할 수 없다”고 조언했다.
/세종=김영필·박형윤기자 빈난새기자 susop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