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대2로 끌려가던 2피리어드 9분31초. 랜디 희수 그리핀의 스틱을 떠난 퍽이 일본 골리 고니시 아카네의 다리 사이를 통과했다. 올림픽 사상 첫 단일팀인 ‘코리아’의 역사적인 첫 골. 2018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조별리그 세 경기 동안 150분여를 기다린 짜릿한 순간이었다. 남북 선수들은 한데 모여 진한 포옹을 나눴고 한반도기를 흔들던 북한 응원단 등 4,000여 구름 관중은 경기장이 떠나갈 듯 환호성을 내질렀다.
남북 단일팀이 14일 일본전에서 분전 끝에 1대4로 졌다. 이전 2경기에서 스위스와 스웨덴에 각각 0대8로 크게 졌던 단일팀은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마침내 골문을 열었다. 18골을 내준 뒤 얻어낸 귀중한 1골이었다. 단일팀의 올림픽 데뷔골 무대가 일본전이었다는 사실도 뜻깊다.
올림픽이 처음인 단일팀 선수들은 닷새 동안 3경기를 치르는 빡빡한 올림픽 일정에 이미 녹초가 된 상태다. 두 경기를 마친 뒤 예정했던 훈련을 아예 취소하고 휴식을 취해야 했을 만큼 ‘방전’ 상태였다. 그러나 일본에는 쉽게 질 수 없다는 각오로 나선 선수들은 내일이 없는 것처럼 몸을 내던졌다. 일본은 경기 시작 4분도 지나지 않아 두 골을 몰아치며 기세를 올렸지만 단일팀은 이후 빠르게 전열을 가다듬었다. 너나 할 것 없는 육탄방어와 골리 신소정의 신들린 선방에 일본은 다소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첫 골이 나왔다. 주인공은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 출신 귀화 선수 랜디 희수 그리핀. 남북이 힘을 모은 경기에서 얼마 전까지 미국 국적이던 선수가 첫 득점을 올리는 이색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득점을 도운 선수는 미국 입양아 출신인 박윤정(마리사 브랜트)이었다.
그리핀은 링크 밖 경력이 더 화려하다. 하버드대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듀크대 생물학과 석·박사 통합과정을 밟고 있다. 그는 그러나 좋아하는 아이스하키로 국가대표의 꿈을 이루기 위해 휴학계를 내고 특별 귀화 과정을 밟았다. 아직 한국어는 거의 하지 못한다.
한국은 단일팀 구성 이전에 역대 일본전에서 7전 전패를 당했다. 7경기에서 106실점 하는 동안 득점은 고작 한 번이었다. 2007년 창춘 아시안게임에서 무려 0대29로 참패하기도 했는데 1년 전 삿포로 아시안게임에서는 0대3으로 져 희망을 보였다. 일본전 득점은 6년 만이다.
일본은 세계랭킹 9위의 강호다. 한국은 22위, 북한은 25위. 아이스하키는 랭킹 차이에 따른 경기력 격차가 가장 뚜렷한 종목이다. 단일팀은 그러나 한 수 위 일본을 맞아 마지막 3피리어드에 두 골을 내주기 전까지 거의 대등하게 맞서는 등 투혼의 경기로 가능성을 확인했다. 세라 머리(캐나다) 단일팀 감독은 “우리 선수들이 최고의 경기를 보여줬다. 지금까지 일본을 상대로 한 경기 중에서 최고였다”며 “경기 시작 5분도 안 돼 2골을 내줘 자칫 포기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잘 싸워준 선수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단일팀이 성사된 뒤 남북을 따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팀으로 생각했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다들 한 팀이 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고도 했다. 서경 평창 펠로(자문단)인 김정민 MBC 해설위원은 “일본은 앞선 두 경기와 달리 새 얼굴에 올림픽 데뷔전 골리 기회를 줬다. 그렇다 해도 2피리어드에 단일팀이 일본을 상대로 1점 차의 추격전을 벌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주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3전 전패로 조별리그를 마친 단일팀은 아쉬움의 눈물을 쏟았지만 대회 일정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오는 18일부터 진행될 5~8위 순위결정전 두 경기가 남아 있다. 단일팀은 4강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B조 3위(1승2패) 일본과 재대결할 가능성이 크다. 이제 목표는 득점을 넘어 승리다. /강릉=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