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경영계와 정치권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소속 H 의원이 주요 그룹 관계자들을 움직여 22일 경총 총회의 차기 회장 선임절차를 무산시켰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중소기업 오너 경영자이자 국회의원 출신인 박상희 대구경총 회장이 차기 경총 회장에 내정됐다고 알려지자 자신이 미는 손경식 CJ 회장을 차기 회장에 선임되게 하기 위해 총회를 파행시켰다는 게 의혹의 골자다.
의혹이 사실이라면 상황은 대단히 심각하다. 정치권이 경제단체 회장 선임에 개입하는 것은 정치와 경제의 분리, 관치 관행 근절을 외치는 현 정부의 기조와 정반대되는 행태다. 정치권의 경제단체장 인선 개입과 관련된 잡음은 이번뿐이 아니다. 김인호 전 한국무역협회장은 지난해 10월 “정부로부터 사임 메시지를 받았다”고 폭로한 뒤 돌연 사임했다. 김 전 회장은 친박 좌장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와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경제·산업계는 이번 스캔들로 전국경제인연합회에 이어 경총까지 식물상태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전경련은 지난 정권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재계 창구 노릇을 한 것으로 드러난 뒤 해체 위기까지 몰린 상태다. 경총 역시 홍역을 치르면서 차기 회장이 누가 되든 경영계를 대변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4대그룹의 한 임원은 “전경련에 이어 경총까지 벙어리가 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면서 “경총 사태가 잘 해결되지 않으면 경영계를 대변하는 창구는 마비되고 말 것”이라고 우려했다.
“경총만이 ‘비판다운 비판’ 창구였는데..”
근로시간·최저임금 등 ‘일방통행’ 우려
실제로 이날 경제계 안팎에서는 의견 전달통로가 막힐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증폭됐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경제5단체 중 순수 민간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전경련과 경총 두 곳”이라며 “식물 상태인 전경련을 제외하면 경총만이 정부 눈치를 보지 않고 비판다운 비판을 할 수 있는데 스텝이 완전히 꼬이게 됐다”고 아쉬워했다.
정부가 경제·산업정책을 집행하면서 기업 현장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진 정책이라도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이 때문에 경제계에 대한 정치권의 개입과 조종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특히 근로시간 단축, 최저임금 범위, 휴일근로 중복할증, 파견근로 허용범위 조정 등 정부 여당과 경제계의 입장이 다른 현안이 산적한 지금 무엇보다 자유로운 소통이 중요하다는 게 중론이다.
한편 H 의원은 서울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가까운 선배가 CJ에서 대관업무 보는 임원을 데려왔기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한 것이 전부”라며 “국회의원이 거기까지 개입할 수 있겠나”라고 의혹을 부인했다. 그러나 국회의원이 특정 대기업의 대관 담당 임원과 차기 경총 회장 건에 대해 얘기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한 처신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맹준호·권경원기자 next@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