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정여울의 언어정담] 듣는 귀가 언어를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작가

러 문학작가 알렉세예비치

전쟁에 짓밟힌 여성의 참상

귀 기울여 세상 밖으로 꺼내

뼈아픈 깨달음 다다르게 해

정여울 작가




카프카의 소설을 읽을 때는 독일어를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읽을 때는 영어공부, 루쉰의 작품을 읽을 땐 중국어 공부에 대한 열정이 샘솟는다. 번역된 작품을 읽어도 이렇게 감동적인데 원어로 읽으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하는 궁금증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잠깐씩 외국어 공부에 열을 올린다. 끈기가 부족해 금세 열기가 식어버리긴 하지만, 그 나라의 훌륭한 문학작품을 원어로 읽는 것보다 더 완벽한 외국어공부 방법은 흔치 않음을 매번 깨닫는다. 외국어뿐 아니라 그 나라의 문화, 역사는 물론 사람들의 집단적 심리나 개개인의 미세한 감정의 떨림까지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엔 스베틀라나 알렉셰예비치가 나로 하여금 ‘이제는 러시아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인가’하는 행복한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러시아어는 워낙 어렵다는 소문이 자자해 아예 시도조차 해볼 엄두를 내지 않았건만, 알렉세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 ‘아연소년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등을 읽고 있으면 그녀의 절절한 감수성과 따스한 마음씨가 그녀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모든 시공간의 장벽을 허물어버리는 듯하다.

2415A27 언어정담



소설도 시도 희곡도 아닌데 이토록 아름다운 문학작품이 빚어지다니. 스토리텔링이나 장르에 대한 우리의 모든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그녀의 폭발적인 글쓰기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또 다음 책은 언제 번역이 되나 기다려진다. 그녀의 글을 읽고 있으면 글쓰기는 단지 내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글이 아니면 세상 어디에서도 울리지 않을 숨은 목소리들을 온몸으로 발굴하는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녀가 귀 기울이는 사람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그동안 차마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발설하지 못한 사람들의 억눌린 목소리에서 우러나온다. 러시아를 침공한 독일군에 맞서 용감히 전쟁터로 나간 여성들, 전쟁터에서 단지 간호나 취사만 한 것이 아니라 총을 들고 직접 싸우고 독일군 탱크를 폭파하는 임무까지 해냈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우리가 전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전쟁에서 승리한 남성들의 서사뿐이었구나’하는 뼈아픈 깨달음에 다다르게 된다. 독일 병사에게 강간을 당해 그의 아기를 임신한 러시아 여성이 차마 적군의 아이를 낳을 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야기, 독일군과의 전투 중 전신화상을 입어 불구가 된 후 전쟁이 끝난 뒤에도 가족에게조차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리지 않은 여성의 이야기, 그리고 전쟁 중에 러시아군인과 사랑에 빠졌지만 전쟁이 끝난 뒤 조강지처에게 돌아 가버린 그 사람을 평생 그리워하며 그의 딸을 낳고 혼자 살아온 여성…. 그 모든 이야기가 슬픔과 분노와 비애의 멜로디를 연주하며 가슴 속에서 깊고 깊은 한숨의 오케스트라를 빚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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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셰예비치는 이렇게 쓰라리고 아픈 이야기야말로 승리자의 역사, 남성들의 전쟁, 국가주도의 기억만들기 속에서 잊히고 짓밟히는 소수자들의 목소리임을 밝혀낸다. 화려한 문체를 구사하지도 않고 두드러지게 자신만의 목소리를 드러내지도 않는다. 청춘과 행복, 목숨까지 바쳐 싸웠지만 영웅으로 대접받기는커녕 ‘결혼하기에는 뭔가 꺼림칙한 여성’으로 홀대 받으며 평생 죄의식 속에서 살아온 여인들. 그들의 이야기가 그녀의 글 속에서 담담하게 울려퍼질뿐이다. 알렉셰예비치의 독특한 문학세계는 누구도 들어주려 하지 않는 이야기를 끝내 들어주고자 하는 작가의 따스한 마음, 온갖 말줄임표와 침묵과 망설임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까지도 끝내 세상 밖으로 끌어내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가 만들어낸 눈부신 기적이다. 작가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그녀들의 목소리를 세상 가득히 울려 퍼지게 하고, 옛날이야기를 기다리는 어린 소녀처럼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녀들의 넋두리를 들어주기도 한다. 애써 자신을 드러내려하지 않고 자신의 글 속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울음과 절규를 참고 또 참아온 여성들의 목소리가 최대한 날 것 그대로 울려 퍼지게 내버려둔다. 때로는 입술보다 귀가 더 커다란 언어적 울림을 표현해낸다. 누군가 반드시 들어주어야만 세상 밖으로 흘러넘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말 잘하는 입술’이 아니라 ‘타인의 말을 잘 들어주는 귀’가 더욱 절실히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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