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明鏡止水] 나는 맞은 적 없다

월호스님 조계종 행불선원 선원장

몸과 마음 '나'를 담는 그릇일 뿐

관찰자로서 얽매이지 않아야

채울 수 있는 해탈의 길 열려

월호스님월호스님


근세 선의 중흥조 경허 대선사는 아이들에게 자신을 때려주면 돈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아이들이 자신을 때리고 돈을 요구하자 “나는 맞은 적 없다”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파조타 화상이 숭악에 있을 때 산 중턱에 묘당 하나가 있었는데 심히 영검하였다. 그 묘당 안에 조왕단 하나가 있는데 원근에서 와서 제사를 지내면서 살생을 많이 하였다. 선사가 어느 날 시자를 데리고 묘당에 들어가서 주장자로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그대는 본래 진흙과 기왓장으로 합쳐서 이루어진 것인데 영검은 어디서 왔으며 성스러움은 어디서 생겼는가?”

그러고는 몇 차례 두드리고 다시 말하였다.

“깨졌다. 떨어졌다(破也 墮也).”

그러자 조왕단은 무너지고 말았다. 조금 있다가 푸른 옷에 높은 관을 쓴 이가 나타나서 절을 하면서 말하였다.

“저는 본디 이 묘당에 있는 조왕신입니다. 오랫동안 업보에 꺼둘려 있다가 이제 화상의 무생법문(無生法門)을 듣고 여기를 벗어나서 하늘에 태어나게 되었기에 일부러 와서 사례를 드립니다.”

이에 선사가 말하였다.

“이는 그대가 본래 지니고 있는 본성이다. 내가 억지로 한 말은 아니다.”

그러자 조왕신이 두 번 절하고 사라졌다. 잠시 후에 시봉하는 스님들이 물었다.

“저희들이 오랫동안 스님 곁에서 모시고 있었지만 아직 스님께서 저희에게 일러주시는 말씀을 못 들었습니다. 조왕신은 어떤 지름길을 얻었기에 하늘에 태어나게 되었습니까?”


“나는 다만 그에게 말하기를 ‘진흙 덩이가 합친 것’이라 말했을 뿐 별다른 도리를 말한 일이 없다.”

관련기사



모셨던 스님들이 잠자코 섰으니 대사가 다시 말했다. “알겠는가?”

한 스님이 답했다. “모르겠습니다.”

“본래 가지고 있는 성품인데 어찌하여 알지 못하는가?”

이에 모시는 스님들이 절을 하자 대사가 말했다.

“깨졌다. 떨어졌다.”

0315A27 하단


일체중생의 몸과 마음은 모두 물거품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다. 몸뚱이는 사대(四大)로 이루어져 있고 마음은 육진(六塵)으로 돌아간다. 이 몸뚱이를 이루고 있는 네 가지 요소인 지(地)·수(水)·화(火)·풍(風)이 흩어지면 과연 무엇이 진정한 ‘나’인가? 몸뚱이는 사대의 화합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의 마음이라는 것도 일시적으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에 불과함을 알아야 한다.

한 비구가 부처님으로부터 좌선수행에 관한 설법을 듣고 수행했지만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적합한 수행주제를 받기 위해 부처님을 향해 길을 가다 멀리서 아지랑이가 아른거리는 것을 보았고 이렇게 생각했다. ‘저 아지랑이는 먼 데서 보면 실제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보면 실체를 잡을 수 없다. 이처럼 마음이라는 것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 있지만 그것은 인연의 소치일 뿐 불변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마음을 집중하며 길을 가다 폭포를 만났다. 폭포의 물거품을 바라보며 또 이렇게 생각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도 저 물거품과 같다. 태어남은 물거품이 일어나는 것과 같고 죽는 것은 물거품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이때 부처님께서 그 비구 가까이 몸을 낮춰 말씀하셨다.

“몸이 물거품처럼 허무하고 마음이 아지랑이처럼 실체 없음을 깨닫는다면 그는 능히 감각적 쾌락의 화살을 꺾으리니 죽음의 왕도 그를 보지 못한다.”

몸은 물거품과 같고 마음은 아지랑이와 같은 것이다. 물거품과 아지랑이는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 일시적 현상이 있을 뿐이다. 몸과 마음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를 터득하게 되면 더 이상 몸과 마음에 대한 애착은 없다. 그러므로 죽음의 왕도 그를 보지 못하며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몸과 마음을 대면 관찰할 때 관찰자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이 관찰자야말로 본 마음 참 나인 것이다. 이를 깜박 잊어버리고 몸과 마음을 ‘참 나’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몸은 생로병사(生老病死)하고 마음은 생주이멸(生住異滅)하지만 관찰자는 여여부동(如如不動)이다. 무명(無明)에서 비롯한 몸과 마음에서 해탈해서 본명(本明)인 관찰자로 돌아오니 크고 밝고 충만하기 짝이 없다. 텅 비어 있기에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으며 고정된 나가 없기에 어떠한 나도 만들 수 있다. 한마디로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