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정치일반

[여명] 북핵과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서정명 정치부장

25년간 비핵화 약속 뒤집은 北

대한민국은 핵인질 전락할 위기

굳건한 한미공조로 비핵화 검증을




중국의 대문호 루쉰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전 해인 1934년 여름 ‘병후일기(炳後日記)’라는 수필집을 냈다. 일제 식민시절 저항시인이었던 이육사는 그의 수필 ‘횡액’에서 병후일기를 언급하며 루쉰의 말을 소개했다.

“나는 지금 국가나 사회로부터 그다지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차츰차츰 사이가 멀어져간다. 그러나 요즘 나는 병이 들어 사람들 주의를 갑자기 끌게 됐다. 이렇게 생각하면 병이란 것도 그다지 나쁜 것만은 아닌 듯도 하다. 다병(多炳)이란 것은 세상의 모든 귀골들이 하는 것이니 나 자신도 매우 포시라운 사람들 틈에 끼일 수가 있게 되나 보다.”

병(病)이 주위의 관심을 끌기에 좋은 소재라는 고백이다. 루쉰 수필의 순수성을 배제하고 북한 핵을 들여다보자. 북한은 경제발전과 핵은 일란성 쌍둥이라며 병진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핵이 사라지면 북한 체제도 무너진다며 ‘핵 앓이’를 하고 있다. 핵확산방지기구(NPT) 탈퇴(1993년 3월), 1차 핵실험(2006년 10월), 헌법에 핵보유국 명시(2012년 4월), 6차 핵실험(2017년 9월) 등 제재와 압박이 가해질 때마다 ‘나는 환자’라며 주위의 관심을 끌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고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다음달 말에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만나고 5월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회동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북한과 대화하고 싶다며 구애작전을 펼칠 정도다.


북한의 핵병 전술이 적중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한미연합훈련 규모를 축소하거나 기간을 줄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고 미국 정가에서는 주한미군 철수문제도 거론되고 있다. 아베 총리는 북일수교를 연상시키는 발언까지 했다. 김 위원장이 “비핵화에 나설 수 있다”는 발언을 한 것을 두고 너무 일찍 샴페인 코르크 마개를 따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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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부는 섣부른 낙관론을 접고 신중에 신중을 기해 회담장에 들어가야 한다. 갑자기 제비 한 마리가 온 것을 두고 완연한 봄이라고 오판해서는 안 된다. 북한은 1993년 NPT 탈퇴 이후 25년간 셀 수도 없이 비핵화와 평화를 공언했지만 검증단계에서 헌신짝 버리듯 협상을 폐기했다. 2005년 9·19합의에서는 모든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NPT에 복귀하는 조건으로 에너지를 지원받기로 했다. 하지만 다음해에 1차 핵실험을 했다. 2012년 2·29합의에서는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중단하는 대가로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기로 했지만 그해 4월 장거리 로켓을 쏘아 올렸다. 같은 달 헌법 전문에 핵보유국임을 명시했다. 언행 불일치의 극단을 보여줬다.

김 위원장의 벼랑 끝 전술(brinkmanship)은 통했다. 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을 맞상대로 핵 담판을 벌인다. 이제 살라미(salami) 전술 차례다. 한미가 한 개의 구급약을 주면 새로운 제안을 하고 더 큰 요구를 할 것이다. 한미는 물론 국제사회가 공고하게 쌓아올린 벽돌을 하나둘씩 허무는 벽돌 깨기 전략도 병행할 것이 뻔하다.

앞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실무협상이 줄줄이 열린다. 남북과 북미 정상회담 사이에 실무형 한미 정상회담도 개최될 수 있다. 북한이 내놓은 비핵화라는 그럴듯한 포장에 현혹되지 말고 냉철하게 실행방안을 마련하고 비핵화 검증방법을 논의해야 한다. 북한은 핵 완성을 코앞에 두고 있다. 이번 회담에서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완성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북한의 핵 인질로 전락하고 만다. 3차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고 자만하거나 우쭐해서는 안 된다. 북한의 약속위반과 식언이 언제라도 도질 수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굳건한 한미공조로 비핵화 검증방안을 짜야 한다. 25년간 당하지 않았는가. 언제쯤 영변 약산에 핀 진달래꽃이 핵으로 물들지 않고 탐스럽게 피어날까. vicsjm@sed.co.kr

서정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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