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과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최근 류허 중국 부총리에게 “미국산 반도체 구매를 확대해달라”고 요구했다는 월스트리트저널(WSJ)의 보도에 국내 반도체 업계가 화들짝 놀랐다. 한국과 일본 반도체 구매를 줄이고 자국 제품을 써달라는 것인데 요구 자체가 반시장적일뿐더러 향후 반도체 시장의 호황이 꺾였을 때 반도체 수출을 위협하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7일 유가증권시장에서 SK하이닉스 주가가 전 거래일 대비 3.10% 급락하고 삼성전자가 0.60% 내린 것도 이런 우려가 복합적으로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업계 관계자는 “지금 당장 중국의 반도체 구매 비중 조정으로 국내 업체들이 받을 타격은 크지 않아 보인다”면서도 “다만 이런 판단의 전제인 ‘업황 호조’가 깨진다면 얘기가 달라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업계 ‘공급부족 상황’…현실성 떨어져=반도체 전문가들은 미중 간 물밑 거래에 따라 중국이 미국 반도체 구매 비중을 늘리더라도 당장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국내 업체가 받을 영향은 크지 않다고 못 박았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 메모리반도체 시장의 수급 상황을 판단 근거로 제시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현재 메모리반도체 시장은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는 공급자 중심 시장”이라면서 “생산되는 족족 팔려나가는 상황이라 비중 조정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글로벌 메모리반도체 시장의 90%를 차지하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이 풀 캐파를 가동하고 있지만 시장에서는 품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본격화하면서 대규모 인터넷데이터센터(IDC) 구축에 나선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서버용 반도체 주문을 쏟아낸 게 가장 큰 이유다.
설사 중국이 미국 반도체 수입을 늘리려 해도 미국 업체가 주문에 대응하기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설비투자 결정부터 실제 양산까지 통상 2년여의 시간이 필요하다. 당장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물량을 줄이면 이를 대체할 제품이 없는 셈이다.
엄연하게 벌어져 있는 기술격차도 실현 가능성을 낮게 만든다. 메모리 시장에서는 얼마나 미세공정이 이뤄졌느냐로 기술 수준을 가늠하는데 삼성전자는 현재 10나노(1㎚=10억분의1m) 2세대 공정을 적용해 D램을 양산하고 있다. 회로 선폭이 가늘수록 웨이퍼 한 장에 새길 수 있는 칩의 숫자가 늘어나 생산성이 향상된다. 삼성전자의 10나노 2세대 공정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주대영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스마트폰용 D램의 경우 일부 마이크론 제품을 사용해도 성능 차이가 크게 없을 수 있겠지만 더 높은 기술 수준을 요구하는 데이터센터용 반도체는 얘기가 달라진다”면서 “삼성의 기술력을 쫓아갈 수 없고 이 때문에 중국 업체들도 삼성 제품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고 평가했다.
◇업황 바뀌면?…그래도 불안한 韓 반도체=국내 반도체 업계가 미국 정부 요구의 실현 가능성을 낮게 보는 것은 업황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 글로벌 조사기관들이 이른바 ‘반도체 고점론’을 꺼내 든 상황이어서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처지다. 판단의 전제 자체가 뒤집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투자은행(IB) 모건스탠리는 지난해 말 “조만간 반도체 공급과잉이 올 것”이라고 경고했고 가트너 역시 메모리반도체 시장 성장 둔화를 예상했다. 우상향 추세는 당분간 이어지겠지만 성장세가 예년에는 못 미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중국 반도체 업체들이 연말께부터 속속 메모리반도체 양산에 들어가는 가운데 공급과잉이 현실화하고 대중(對中) 수출 물량을 미국에 일부 빼앗기는 상황이 겹치면 반도체를 넘어 한국 경제가 입을 타격은 막대하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반도체 수출은 997억달러로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7.4%에 달했다. 그해 4·4분기에는 20%를 넘어섰을 정도로 반도체 의존도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