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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보이' 이상호 "58년만 첫 메달 아직 실감 안나 별명에 맞게 김장봉사도 할래요"

평창올림픽 스노보드 은메달 '배추보이' 이상호

'4강도 잘했다' 생각에 부담 안돼

마지막 손뻗는 동작까지 몸이 기억

월드컵 성적 부진 등 우여곡절에도

제 기량 보여줄 수 있단 믿음 가져

베이징 올림픽선 금메달 딸 것

평창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이상호가 인터뷰에 앞서 스노보드 타는 자세를 취해 보이고 있다. /권욱기자평창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이상호가 인터뷰에 앞서 스노보드 타는 자세를 취해 보이고 있다. /권욱기자



‘배추보이’. 유행에 민감할 스물세 살 청년에게는 어쩌면 듣기 싫은 별명일 수도 있다. ‘힙’한 것과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어 보이고 일단 웃음부터 유발한다. 다른 별명이면 더 좋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이 별명의 주인공인 스노보드 국가대표 이상호는 그러나 배추보이를 버릴 마음이 없어 보인다. “올림픽 끝나고 많은 분들이 배추 하면 김치가 떠오르니까 김장을 한번 해보면 어떻겠냐고 농담처럼 얘기하세요. 근데 생각해보니 그것도 정말 괜찮을 것 같아요. 김장철이 다가오면 김치담그기 봉사를 하고 김치냉장고도 기부하는 거죠. 농담 아니고 정말 생각 있습니다.”

2018평창동계올림픽 이후 한 달. 설상 종목 사상 첫 메달로 한국 올림픽사를 다시 쓴 이상호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시상식에 다녀오느라 정장을 빼입었다는 그는 사진기자의 포즈 요청에 “이게 되려나”라며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이내 멋지게 슬로프를 가르는 동작을 취해 보였다.

이상호는 지난달 올림픽 스노보드 평행대회전에서 이 동작으로 은메달을 따냈다. 폐막 전날에 터진 이 극적인 메달로 한국은 ‘빙상 메달만 있는 나라’에서 ‘스키 종목에서도 메달 따는 나라’로 ‘신분’이 바뀌었다. 한국 스키가 동계올림픽에 처음 참가한 지난 1960년 이후 58년 만에 나온 최초 메달이다.


“메달 따고 휴대폰 메신저로 받은 축하인사만 거의 1,500건”이라고 돌아본 이상호는 “이곳저곳에서 불러주셔서 무척 바쁘긴 한데 58년 만의 첫 메달이라는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도 실감이 안 난다”고 했다. “실감이 안 나기 때문에 더 차분하게 다음을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설명. 20대 초반의 나이와 다이내믹한 종목 특성상 톡톡 튀는 성격을 예상했는데 말 한마디와 제스처 하나하나에서 진중함이 묻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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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3월 터키 월드컵에서 한국 설상 최초로 2위에 오르며 올림픽 메달 기대를 높여놓은 이상호였지만 실제 메달까지는 결코 쉽지 않았다. 올림픽 전 마지막 월드컵에서 13위에 그치는 등 시즌 월드컵 랭킹 10위로 올림픽을 맞았다. 올림픽이 시작되고 나서도 일이 꼬였다. 강풍 탓에 예선 경기가 연기돼 예선과 결선을 하루에 치르게 된 것. 경기 당일에는 2개 코스 중 햇볕에 장시간 노출된 블루 코스가 일부 녹아내리는 변수도 생겼다. 예선 순위에서 밀린 이상호는 4강에서 불리한 코스에 배정받았다. 그러나 결과는 0.01초 차의 승리. 예선 2위인 얀 코시르(슬로베니아)를 손끝 차이로 제치면서 새 역사가 쓰였다.

이상호는 준결승을 떠올리며 “부담이 클 수 있었는데 부담이 안 됐다. 4강에 올라간 것만으로 충분히 잘했다는 생각으로 후회 없는 경기만 하자는 마음이었다”고 했다. 마지막 순간 손을 뻗는 동작은 항상 연습해온 것이라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고. 월드컵 성적이 주춤했던 이유는 바인딩(보드와 부츠를 잇는 장비) 때문이었다. 이상호는 “올림픽을 위해 새로 바꾼 바인딩에 적응하는 기간이었다. 올림픽에서는 제기량을 보여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며 “올림픽 경기를 한 달도 안 남기고 바인딩의 세팅도 조금 손을 봤는데 결과적으로 잘 맞아떨어졌다”고 설명했다.

강원 사북 출신의 이상호는 잘 알려졌듯 고랭지 배추밭이 있던 슬로프에서 훈련하며 꿈을 키웠다. 그래서 배추보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외국 선수들도 친한 몇몇은 알 정도가 됐다고. 해외 중계진은 그를 ‘아시아의 선두주자’라고 부른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이상호는 “(배추밭이던 슬로프는) 리프트도 없어서 한 번 타고 내려오면 걸어 올라가야 했다. 그때는 신나고 재밌어서 힘든 줄도 몰랐다”고 했다. 평행대회전은 최고 시속 80㎞까지 찍히는 아찔한 종목인데 그는 “워낙 겁이 없어선지 그저 짜릿한 기분뿐이었다”고 했다.

눈썰매장에 데려간 아버지에게 이상호는 스노보드 강습이 더 재밌을 것 같다고 했고 그렇게 시작된 도전이 올림픽 메달까지 이어졌다. 지금도 정선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아버지는 아들의 올림픽 메달 이후 “겸손한 선수가 돼야 한다”고 늘 강조한다고. 최근 모교인 사북고를 방문해 장학금 500만원을 전달하기도 한 이상호는 “항상 힘들었고 항상 도망가고 싶었던 훈련과정을 어떻게든 이겨냈더니 이런 날이 왔다. 저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에게 희망의 아이콘이 되고 싶다”고 힘줘 말했다. “2022년 베이징올림픽에 또 나가고 싶고 금메달을 따는 게 목표인 것도 바로 그런 이유”라고. 이상호는 오는 5월 진천선수촌에 소집돼 베이징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는다.


양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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