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정답 없는데 순환출자는 惡”…이분법 잣대로 기업 옥좨

[지배구조 개혁 무엇이 문제인가]

<1> 기업 손발 묶는 정부 주도 개편

투자 절실한데 수조원 들어가는 지배구조 개선 압박만

'주주 환원' 명분에 헤지펀드 '한몫 챙기기' 수단 우려도

"미래 먹거리 확보 가능하게 기업에 자율권 줘야" 목소리

김상조(가운데) 공정거래위원장이 지난해 11월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공정거래위원장과 5대 그룹 간 정책간담회’에서 참석자들에게 자리를 권하고 있다.  /권욱기자김상조(가운데) 공정거래위원장이 지난해 11월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공정거래위원장과 5대 그룹 간 정책간담회’에서 참석자들에게 자리를 권하고 있다. /권욱기자



기업은 생물과 같다. 시대 흐름에 따라 최고 효율을 발휘하는 방향으로 스스로 움직여왔다. 순환출자 고리 형성도 마찬가지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대우를 비롯해 대기업그룹이 줄줄이 무너졌다. 무분별한 차입경영과 계열사 간 얽히고설킨 순환출자 구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긴 곳들 상당수는 이때를 기점으로 순환출자 고리가 늘었다. 부실에 빠진 계열회사를 살리기 위해 유상증자에 참여하면서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는 “순환출자 고리 형성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면 반드시 잘못됐다고 할 수만은 없다”고 지적했다.

압축성장의 산물이던 순환출자가 정부의 청산 압박 속에 빠른 속도로 정리되고 있다. 지난해 93개였으나 현재는 12개로 줄어든 재계 순환출자 고리 개수가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문제는 정부가 순환출자는 악(惡)이고 이를 해소하는 게 선(善)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무작정 기업을 몰아붙이고 있는 점이다. 고용과 투자, 미래 먹거리 확보에 나서야 할 기업들이 수십 년 전 형성된 순환출자 해소에 쫓겨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시험 코앞인데 책상 정리하기 바쁜 기업들=현대자동차그룹은 지난달 급작스레 현대모비스를 지배회사로 하는 지배구조 개편안을 내놓았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의 3월 데드라인 발언에 대한 응답이었다. 핵심은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의 순환출자를 해소하는 것인데 여기에 드는 자금이 너무 크다. 주식 매입에 필요한 자금 4조원, 오너 일가와 각 계열사 간 주식거래에 따라 내야 하는 세금도 1조원에 이른다. 단순히 지배구조를 재편하는 데 대략 5조원이 드는 셈이다. 이는 핵심 계열사인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 3사가 지난해 연구개발(R&D)에 투자한 금액(4조9,000억원)보다 많다.


다른 글로벌 기업들은 어떨까. 폭스바겐그룹은 오는 2023년까지 약 91조원을 전기차와 자율주행차 등 미래 모빌리티에 투자한다. 다임러그룹 역시 13조원을 전기차 개발에, 도요타는 3조원을 들여 R&D단지 조성에 나선 상태다. 이들은 기존 R&D 비중도 현대차를 훌쩍 앞서 있던 곳들이다.

관련기사







삼성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공정거래위원회가 2015년 내린 해석을 뒤집는 바람에 삼성SDI는 삼성물산 지분 404만주를 추가 처분하며 순환출자 고리를 끊었다. 기존 형성된 순환출자 고리는 해소 의무가 없지만 삼성은 정부 압박에 나머지 4개의 고리도 모두 없앨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매각 대상인 삼성물산 지분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나 다른 계열사가 사들인다면 수천억 원의 자금이 들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에 금산분리 규정에 따라 삼성생명·화재가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 일부도 매각해야 한다. 지주사 격인 삼성물산이 지분 일부를 인수하는 방안이 유력한데 삼성전자 자사주 소각으로 금산 규제가 허용하는 지분율(10%)을 초과하게 되는 지분 0.4%분만 사들인다 해도 1조원 넘는 자금이 필요하다. 조동근 명지대 교수는 “기회비용 측면에서 볼 때 R&D 등 미래 투자에 써야 할 돈을 재배구조 개편에 쏟고 있다”고 말했다.

◇주주 환원 명분으로 헤지펀드에 자금 빠져나갈 수도=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들어가는 자금은 엄밀히 따지면 오너 일가가 상당 부분 부담해야 한다. 그렇다고 회사 부담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지배구조 개편 작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 기업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글로벌 투기자본의 공습이다. 현대차그룹이 지배구조 개편 계획을 내놓자마자 약 1조원어치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엘리엇이 대표적이다. 투자은행(IB) 업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문재인 정부 출범을 전후해서 외국계 헤지펀드들 사이에서 ‘한국 시장에 큰 장이 열렸다’는 인식이 팽배했다”며 “현대차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등장한 엘리엇을 시작으로 향후 다수의 헤지펀드들이 한몫 챙기려는 작업을 본격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과거 소버린의 SK 공격, 칼 아이컨의 KT&G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 시도 사례에서 볼 때 적게는 수천억 원에서 많게는 수 조 원의 자금이 ‘주주 환원’ 명분으로 기업에서 빠져나갈 가능성이 크다.

◇부작용 뻔히 보이는데도 속도 내라는 정부=그럼에도 정부는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김 위원장은 이달 10일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삼성이 여전히 그룹 지배구조에서 핵심이 되는 점에 대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며 “이 부회장 재판 관련 불확실성이 해소된다면 삼성도 비가역적인 변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단계적으로 지배구조 개편 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속도가 기대에 못 미친다’는 공개적인 압박인 셈이다.

윤 교수는 “무릇 정책은 종합적 판단 아래 이뤄져야 한다”며 “순환출자 고리 해소 때문에 기업 투자 등 미래 대비가 미흡해질 수 있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재영·조민규기자 cmk25@sedaily.com

조민규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