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유튜브 등 1인 미디어가 디지털 신(新)질서를 만들고 있는 이때 단순히 경쟁 은행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는 것은 금융 비즈니스에서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온라인 쇼핑·유통 회사가 어떻게 결제까지 묶어 플랫폼을 만들고 금융시장까지 잠식해 나가는지 빠르게 감지하는 게 더 중요한 때입니다.”
김경준 딜로이트컨설팅 부회장은 26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14회 서경금융전략포럼 강연에서 ‘디지털 시대 금융산업 경계의 종말과 새로운 지평’이라는 주제로 이같이 말하며 진짜 ‘금융혁신’을 이뤄내기 위해 산업 경계를 허물고 시야를 넓힐 것을 당부했다.
아마존 등 강력한 정보통신기술(ICT)을 무기로 장착한 유통 기업들은 정통 은행 산업 근간을 흔들 정도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며 금융 시장을 잠식해 나가고 있다. 일례로 아마존은 플랫폼을 이용하는 소매상들을 대상으로 최저 연 6%의 금리로 대출해주는 ‘아마존 렌딩’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 이미 지난 2002년부터 JP모건과 협력관계를 구축, 아마존 이름을 붙인 신용카드를 발급해 2,100만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기도 하다. 여전히 배가 고픈 아마존은 강력한 디지털 DNA가 탑재된 전 세계 밀레니얼(1982∼2000년에 태어난 이들) 세대를 겨냥, 생애 최초 주택 구입 단계에 접어드는 이들을 주 고객으로 한 담보 대출업(mortgage lending) 부문까지 넘보고 있다. 그러나 김 부회장은 이 같은 아마존의 아성조차 무너뜨릴 신생 거물이 금융시장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가 말한 신생 거물 중 한 곳은 블록체인 기술을 앞세운 캐나다의 온라인쇼핑몰 ‘오픈 바자’이다. 이 업체는 2015년 블록체인 개념을 적용, 개인 간 거래(P2P) 플랫폼을 선보였다. 판매자와 구매자가 만나는 공간만 제공할 뿐 중간 유통 단계를 없애면서 중개수수료를 별도 과금하지 않는다. 거래대금은 암호화폐인 비트코인으로 내기 때문에 이체 수수료나 카드 비용도 발생하지 않는다. 판매자는 기존 오프라인 시장과 비교했을 때 수수료 비용을 줄이고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음과 동시에 소비자 역시 번거로운 결제 단계 없이 간편하게 상품을 살 수 있는 셈이다. 김 부회장은 “기존 플랫폼의 경우 플랫폼 소유자가 중개자 역할을 독점했지만 오픈 바자는 여러 중개인의 존재가 가능하다”며 “중앙집중화된 독점적 중개인이 없고 참여자들에게 가해지는 제약도 거의 없으며 가입 비용과 가입을 위해 계정을 만들 필요도 없는 P2P 장터”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잘 나가는 아마존도 오픈 바자(중개료 없는 유통 플랫폼) 개념이 확산되면 파산할 수밖에 없다고 (위협을) 느낄 정도”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움직임은 은행의 경쟁력이 더 이상 은행이 아니라는 점을 더욱 확연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국내 은행들 유수는 은행의 경쟁자가 글로벌 ICT 기업이 될 것이라는 위험 감지만 이뤄졌을 뿐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구심점조차 마련하지 못했다. 모바일 서비스 향상 등 1차원적 디지털 대응전략이 아닌 진짜 혁신다운 혁신을 만들기 위해서는 디지털 전략 전반을 과감히 수술대에 올려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 부회장은 강연에서 “미래 은행은 금융기관이 아닌 소프트웨어 업체가 돼야 한다”며 “금융기업은 플랫폼과 연결성을 강점으로 하는 대형 정보기술(IT) 업체들의 시장 잠식을 막고 성장 모멘텀을 확보하기 위해 ‘오픈 뱅크 플랫폼’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부회장은 추후 디지털 시대 흐름에 맞춰 은행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크게 네 가지로 압축했다. 하나는 고객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다각적인 관점에서 수집하고 최대한 세분화하는 것이다. 김 부회장은 “금융 소비자 니즈(수요)가 뭔지에 대한 통찰이 뒤떨어지면 결국 아마존 등에 당한다”며 “데이터 분석가 등 자질을 갖춘 인력에 대한 갈증을 일찌감치 해결하는 곳이 결국 새 금융시장을 장악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디지털 DNA가 탑재된 젊은 인력을 끊임없이 재교육하고 역량 있는 이들을 빨리 선발해 기존 전문가와 융합시켜 단기간 역량을 높이는 등 ‘디지털 항해’가 가능한 현실적 인력 구조를 속히 갖춰야 한다는 설명이다.
비금융 플랫폼으로의 확장도 고려해볼 만한 대목이다. 그는 “이종 산업과의 플랫폼 공유로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신규 금융상품 개발기회나 금융상품 판매채널을 확보할 수 있다”며 “제휴사는 은행의 분석정보와 금융 서비스를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어 시너지 창출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금융 이외 상품을 금융 채널로 파는 것도 대안이다. 당장은 다소 무모한 도전일지라도 부동산, 유통, 여행·레저 등 고객 일상생활 전반을 지원하는 플랫폼 제공자로의 변화 방안도 고려해볼 만하다는 설명이다.
김 부회장은 “‘디지털 플랫폼’은 이제 일반명사가 됐다”며 “마치 자전거를 타듯 끊임없이 페달을 밟고 움직이면서 균형을 잡아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