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중소기업 정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기업 규모로 지원을 차등화한다는 점입니다.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넘어가는 순간 모든 지원이 사라지고, 오히려 규제는 늘어나니 중소기업에 머물기 위해 온갖 꼼수를 쓰는 기업들이 넘쳐나기 마련이지요.”
김승일(64·사진) 파이터치연구원장은 26일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기업 규모와 상관 없이 기술 개발과 혁신을 통해 글로벌 시장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정부가 선의를 갖고 펴는 각종 정책이 오히려 이들의 발목을 잡고, 더 나아가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대 경영학 박사인 김 원장은 중소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을 거쳐 중견기업연구원장(2015~2016년)을 지낸 중소중견기업 전문가다. 그는 지난 수십 년간 우리나라가 농업에 수백 조원을 퍼부었지만, 정작 농민의 경쟁력은 떨어지고 농업의 영세성도 가속화됐다며 중소기업 정책이 그런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이제라도 지원보다는 혁신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 원장은 “지금까지 중소기업 지원은 자금과 인력, 기술, 판로 등 기업이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모든 부분을 도와주는 백화점식 방식이었지만 ‘깨진 독에 물 붓기’ 수준에 그치고 있다”며 “개별 중소기업 지원은 획기적으로 줄이고 생태계 자체를 혁신하는 방향으로 큰 틀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차원에서 중소벤처기업부가 ‘중소벤처기업 지원’이라는 설립 목적을 다소 희석시키더라도 규모에 집착하는 현재의 지원 방식에서 벗어나 어떤 (중소기업) 정책은 중견기업도 넣어주고, 중소기업 전용 정책이지만 소상공인도 혜택을 주는 등 영역을 확장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김 원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어떤 나라도 일정 규모로 잘라서 갈등을 부추기는 곳은 없다”며 “대표적으로 미국 역시 사회정책적 관점에서 보호와 육성이 필요한 소상공인에 집중하고 있을 뿐 중소기업과 중견기업을 굳이 구분해서 지원하진 않는다”고 지적했다.
같은 업종의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목소리를 내는 기존 방식으로는 중소기업계의 혁신을 기대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견해도 밝혔다. 그는 “지금도 단체수의계약에 뿌리를 두는 기업들의 목소리만 크고, 기술 개발을 통해 새로운 품목으로 정부조달시장에 들어오려는 기업이나 조합에 비협조적인 기업은 철저하게 배제하는 ‘담합 생태계’가 횡행하고 있다”면서 “같은 업종 조합 중심이 아니라 지역별, 이업종 연합회가 중심이 돼야 융합 생태계가 가능하고 이런 바탕에서 ‘혁신 생태계’로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 정부가 내놓는 청년 일자리 정책에 대해서는 일단 방향은 맞다면서도 신중한 입장이다. 그는 “기존 국내 중소기업 정책이 주로 ‘사업주’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는데 이를 ‘더 좋은 일자리 창출’과 ‘근로자 지원’으로 바뀌어야 한다”며 “청년내일채움공제나 세금감면혜택, 주거비나 교통비 지원 등이 수혜자 입장에서는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방향은 제대로 잡았다”고 평가했다. 다만, 중장기적으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납품단가 현실화 등 근본적인 시스템 변화를 통해 중소기업 스스로 임금 지불 능력을 끌어 올리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독일의 사례를 소개했다. 김 원장은 “독일의 미텔슈탄트의 경우 직원이 해당 기업에 일정 기간 이상 근무하면 공무원 연금 수준의 혜택을 주는 등 안정적인 직장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준다”면서 “중소기업에서 양질의 일자리가 창출되면 궁극적으로 출산율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역시 중요한 기로에 놓여 있다”고 짚었다.
경제민주화를 규정한 헌법 제119조에 한국 경제의 해법이 있다는 김 원장은 “경제 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 민주화를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는 이 조항은 한국 경제가 현재 겪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면서 “중소기업부터 대기업까지 각 경제주체가 공정한 경쟁 속에서 스스로 경쟁력을 높이고 혁신을 일구면서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혁신 생태계’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파이터치연구원은 지난 2016년 9월 출범한 한국정보통신이 출자해 만든 비영리재단으로, 4차 산업혁명 등 기업 환경 변화에 대응하고 지속 가능한 경제를 위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을 설립 목적으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