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이효리에서 걸그룹 아이돌까지, K팝 비즈니스에서 정치까지, 딸 자랑에서 술 끊은 사연까지. 50대에 들어선 백발의 작곡가의 입담은 종횡무진이었다. 뮤지컬 ‘브라보 마이 러브’의 무대를 위한 막바지 런스루(run through·실제 공연처럼 하는 연습)가 한창인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김형석(52·사진)은 자신의 이야기를 소탈하게 들려줬다.
작곡가로서 지난 19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르네상스를 한복판에서 이끌었고 지금은 K팝의 거장 반열에 오른 김형석은 특히 세계를 향한 K팝의 한 단계 도약이 중요한 시점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힘줘 말했다. “아이돌 자체도 진화했고 육성 시스템은 중국 등 아시아 시장에서도 간절히 배우고 싶어하는 매뉴얼이 됐습니다. 이제는 아이돌이 가진 음악적 재능을 끌어내고 이들의 장점을 부각해 멋지게 진열대에 전시할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할 시점이 된 거죠. 세계인이 모두 아는 K팝이라는 카테고리를 통해 다양한 음악을 보여주는 것이 숙제이자 K팝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이라고 봅니다.” 요즘 대중음악이 지나치게 아이돌 음악에 편중됐다는 곱지 않은 시선도 그는 K팝의 도약에 비해서는 부차적인 문제로 봤다. “엑소·방탄소년단·빅뱅 등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는 등 K팝은 이제 세계 대중음악의 한 축을 담당하는 글로벌 음악으로 자리매김했어요. 그런 과정에서 대중음악에서 편중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이돌이 문제는 아니죠.”
K팝의 세계화를 위한 나름의 노력도 김형석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4~5년 전부터 중국에서 실용음악 아카데미 ‘케이노트’를 운영해온 것. 이 때문에 한 달에 며칠을 빼고는 중국에서 체류하고 있는 그는 중국의 음악 시장을 주목하라고 했다. “중국의 인구가 14억명이고 화교까지 합치면 27억명이죠. 시장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이 불가능한 가운데 우리가 할 일이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K팝이라는 든든한 장르가 있기는 하지만 문화는 퍼블리싱 싸움이며 그들과 어떻게 조화롭게 일을 할 것인지가 숙제죠.” 상하이에서 이미 아카데미를 운영 중인 그는 올해 말에는 베이징에 아카데미와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동시에 추진할 예정이다. 한한령으로 고생하지 않았냐는 물음에도 그는 껄껄 웃을 뿐이다. “타격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크지는 않았어요. 상품을 파는 입장이었다면 어려웠겠지만 같이 무엇인가를 하는 상황이었고, 상황이 어려울수록 더욱 신뢰관계를 형성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현재 음반·영화·드라마·매니지먼트를 비롯해 해외 사업 기획 등을 하는 키위미디어그룹(012170)의 회장이다. 지난해에는 키위가 제작 및 배급한 영화 ‘범죄도시’ ‘사라진 밤’ ‘부라더’가 잇달아 흥행에 성공하는 등 영화에 집중했다면 올해는 음악 부문에 역량을 쏟을 계획이다. 특히 업계에서는 그가 데뷔시키는 걸그룹 아이돌에 대한 기대감이 상당하다고 하자 “너무 부담스럽다”며 쑥스러워했다. “걸그룹 멤버는 7명 정도가 될 것 같고 9~10월께 데뷔할 것 같아요. 레드벨벳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주인공 콘셉트를 하는 등 요즘은 아이돌의 세계관과 콘셉트가 상당히 중요한데 이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회사 식구들이 너무 잘해주고 있어 안심이 되기는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걸그룹 이후 남자 아이돌그룹도 데뷔시킬 것”이라고 귀띔해 키위의 음악 사업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김형석은 한국 최고의 ‘섹시 디바’에서 ‘소길댁’으로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을 즐기던 이효리가 돌연 그와 손을 잡고 ‘제2의 음악인생’을 시작한 이야기도 들려줬다. “효리는 커머셜의 정점을 달리던 ‘핀업걸’이었습니다. 제주도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좋든 싫든 과거의 시절을 생각했을 것이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도 고민을 했죠. 그리고 이제는 자기 음악을 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효리가 진짜 하고 싶어하는 음악을 하게 뒀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연예인에서 아티스트로 성장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19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르네상스를 꽃피운 주역 중 하나인 그는 한양대 작곡과 출신으로 대중음악가로서는 흔치 않은 이력이다. 대중음악에 입문하게 된 계기로 대학 선배 유재하와 영화 음악을 꼽았다. “영화 음악을 하고 싶었습니다. 뮤지컬도 마찬가지지만. 구조나 장르에 제한이 없고 화성이나 여러 가지 다양한 음악적 기법을 구사할 수 있는 게 영화와 뮤지컬 음악입니다. 클래식이 음악의 시작이자 기본이고 구조를 여기서 배웁니다. 이를 통해 그다음은 무엇을 할지 고민했고 유재하 형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대중음악을 하게 됐습니다.”
김형석의 음악은 클래식하기도 하지만 문학적이기도 하다. 시간이 흘러도 오래도록 그의 노래가 대중의 사랑을 받고 젊은 가수들에게 리메이크되는 이유다. 여전히 클래식의 영향을 받지만 새로운 사운드, 그리고 자신의 노래를 부를 가수가 자신의 감각을 자극하는 중요한 원천이라고 했다. “클래식의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받아요. 쇼팽·드뷔시 등 주로 낭만파 음악을 좋아하고 팝에서는 데이비드 포스터, 베이비페이스 등이 창작을 하고 싶은 모티브가 되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과거 음악만 듣는 건 아니에요. 위켄드, 트로이 시반 등 해외 젊은 뮤지션들의 음악, 감성적인 리듬앤블루스(R&B)와 일렉트로닉댄스뮤직(EDM)을 통해 새로운 사운드의 재료를 얻죠.” 그러면서 그는 “창작자에게 호기심은 감각일 수 있고, 또 곡을 쓰고 싶은 욕구를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옛날에 듣던 음악이 지금의 사운드와 만나 새로운 ‘케미’를 형성하기도 한다”며 “제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 역시 제게 영감을 주는 훌륭한 아티스트”라고 강조했다.
작곡가 김형석에게 정치란 무엇일까. 그동안 정치에 무관심해 보이던 그가 2012년 대선 당시 ‘사람이 웃는다’라는 선거송을 만들었고 최근에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미스터 프레지던트(Mr. President)’라는 곡을 헌정하는가 하면 세월호 추모곡 ‘그리움 만진다’를 발표했으며 2017년 촛불집회 당시에도 적극적으로 소신 발언을 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정치에 무관심하던 그를 움직인 것은 우선 문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누구인지 정도만 알고 국무총리가 누구인지도 몰랐어요. 사회 이슈를 생각하면 음악적으로 닫힌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혁명보다 혁명가를 더 좋아하듯, 정치인 문 대통령에 대한 매력과 신뢰가 컸어요. 선거송이니 ‘으샤으샤’하는 곡을 만들어야 하는데 발라드가 나오더라고요. ‘운명’이라는 책을 읽고 문재인이라는 사람의 인생에 대해 알게 됐거든요. 그리고 ‘사람이 웃는다’에서도 어떻게 음악으로 표현할 방법이 없어 문 대통령의 육성 웃음을 그대로 사용했어요.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게 아니에요(웃음).”
여섯 살 된 딸 역시 그가 사회적·정치적 참여를 하게 된 이유가 됐다. “한 아이의 아빠가 되면서 세상이 이러면 안 된다고 느낀 것 같아요. 박근혜 정부는 불합리와 뒤틀림이 극치에 달했고 이런 사회에 제 아이가 살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그는 조심스럽게 중학교 3학년 시절 겪었던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억을 꺼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텔레비전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고 형·누나들을 폭도로 매도했죠. 당시에 뭔가 세상이 기울어졌고 ‘거대한 힘이 조종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에 배신감을 느낀 것 같아요. 일상생활에서는 이런 기억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제 무의식에 상처로 남아 있었던 것 같아요. 바로잡지 않으면 기울어진 채로 계속해서 가는데, 지난 정부에서 드러난 불합리를 바로잡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는 또 이러한 활동이 음악과 삶을 자극하는 요소라고도 했다. “정치에 기웃대는 게 아니라 음악적으로 자극이 됐고, 자극을 해소하는 제 행위였어요. 그게 음악으로 나왔고요. 그리고 저는 음악을 하는 제 자리로 돌아왔고요.”
좀처럼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는 그지만 최근에는 예능 ‘싱글 와이프’에 출연해 ‘딸바보’와 ‘허당 가부장’의 모습을 보이며 친근한 이미지를 더하고 있다. “이제 너무 노출됐어요(웃음). 방송이라는 게 편집과 과장이 있기 마련이지만 ‘허당 가부장’의 모습이 있죠. 아내가 모든 것을 다 챙겨주는 건 사실이에요. 예전에는 곡 쓰고 술 마시면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다면 이제는 가족을 위해 절제를 하고 있죠. 폭탄주를 20잔쯤 마실 정도로 술이 세고 잘 마시는데 지난 연말에 술 때문에 몸이 안 좋은 상태에서 딸과 ‘코코’를 봤는데, 제가 아프다고 하니까 딸이 ‘리멤버 미’를 불러주더라고요. 순간 정신이 번쩍 났죠. 술 끊은 지 한 달 됐어요.”
사진=송은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