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특파원칼럼] '세기의 쇼'가 될 북미정상회담

손철 뉴욕특파원

손철



산간벽지도 다 뚫고 들어가는 전파의 힘은 막강하다. 미 로스앤젤레스(LA)에서 2일(현지시간) 막을 내린 밀컨 글로벌 콘퍼런스는 국제 금융계 인사들 사이에서는 첫손에 꼽히는 행사로 일명 ‘미국판 다보스포럼’으로 불린다. 그런데 올해의 콘퍼런스는 예년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개막 이틀 전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이 밀컨 콘퍼런스의 주요 화두로 부상하면서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한국의 존재감이 부쩍 커져 있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하늘의 별 따기’였던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나 억만장자 투자자들과의 인터뷰가 올해는 기자가 “서울에서 왔다”고 한마디 건네는 것만으로 술술 풀렸다. 글로벌 경제계의 거물들이 먼저 “남북한 지도자의 만남에 매우 흥분됐다”며 반색을 보였다. 세계 금융의 중심인 뉴욕에서 일하면서도 ‘북핵 문제에 외국인들의 관심이 이토록 컸다는 것을 몰랐구나’라며 혼자 반성을 하고 있던 차에 옆자리에서 식사를 하던 월가 사모펀드의 부회장이 먼저 아는 척하며 “그 쇼, 정말 대단했다”고 엄지손가락을 세우기도 했다.

‘쇼?’ 그 단어를 듣고서야 한국뿐 아니라 미국도 CNN과 폭스뉴스부터 재계 영향력이 큰 블룸버그TV·CNBC 등의 매체들까지 가세해 4·27 남북 정상회담을 생중계 수준으로 실시간 보도했다는 사실에 기억이 닿았다. 4·27 합의문 내용이 어떤지는 외신기자들조차 알지 못하지만 호텔 보안요원도 문재인 대통령이 북쪽에 잠깐 건너갔다 온 TV 화면을 화제에 올렸다. 지구촌 어떤 독재자도 감히 위협하기를 꺼렸던 미국에 “본토까지 핵미사일 맛을 보게 될 것”이라고 협박을 서슴지 않은 젊은 북한 지도자에 미국인들은 계층에 상관없이 초미의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남북회담 전만 해도 북미 정상회담 개최 후보지 5곳에 포함되지 않던 판문점이 순식간에 유력 후보지로 떠오른 것도 수긍이 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정치인보다 방송인이기를 더 선호하는 ‘폴리테이너(정치인+연예인)’로 정평이 나 있다. 지상파에서 ‘리얼리티 쇼’를 진행하며 쌓은 인기가 트럼프의 기적 같은 대선 승리의 요인 중 하나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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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예고됐듯이 남북 정상회담이 ‘몸풀기’라면 북미 정상회담은 ‘본 게임’이다. 최종적으로 개최된다면 ‘세기의 쇼’가 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만남은 지난 1972년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과 마오쩌둥 전 중국 국가주석의 역사적 만남에 비견될 정도다. 실제로 북미 정상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린다면 지난달 27일보다 외신기자들이 3~4배는 더 몰리며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일대의 숙박 시설이 동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불과 석 달 전만 해도 꿈조차 꾸지 못한 북미 정상 간 만남은 설사 빈껍데기 쇼로 끝난다 할지라도 그 의미가 적지 않다. 하지만 한반도 8,000만 인구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는 우리 정부는 그저 쇼로 끝나서는 안 될 ‘한반도 비핵화’의 중책이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알 것이다.

‘빅쇼’의 여흥이 가신 후 밀컨 콘퍼런스에서 북핵 문제를 놓고 진지한 토론이 벌어지자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은 냉정했다. 북핵 세션에 참석한 대북 전문가 5명은 모두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회의적 시각을 보냈다. 미국 유엔대사를 역임한 대표적 지한파인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주 전 주지사는 오는 2020년까지 비핵화가 마무리될 가능성을 20%로 전망했고, 최근 북한에 다녀온 니컬러스 크리스토프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는 고작 5%에 불과하다고 했다.

트럼프 정부와 미 주류 언론 간 전쟁을 고려해도 북한 비핵화를 바라보는 미 여론의 불신이 만만치 않은 만큼 우리 정부가 조급하게 서둘다 작은 실수라도 하면 역풍은 거셀 것이다. 그래서 이 중차대한 시기에 대통령 특보가 오만하게 ‘주한미군 철수설’에 불을 지피며 국론 분열까지 일으킨 것은 좌시할 사안이 아니다. 미 정치계 거물인 존 매케인 공화당 상원의원이 암 투병 중에도 분열된 미 정치권을 향해 “우리의 문제는 겸손의 결핍이다”라고 질타한 고언을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청와대와 여권이 더욱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runiron@sedaily.com

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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