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백의 양복 차림을 한 노신사는 백팩을 등에 메고 출근했다. 퇴근길에도 그는 백팩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자동차에 탔다. 8일 취임한 윤석헌 신임 금융감독원장이 최근 업무보고를 위해 금융감독연수원으로 출퇴근하던 모습이다. 민간 출신임을 한눈에 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올해 70세인 그는 서울대에 강의하러 다닐 때도 백팩을 메고 지하철을 즐겨 타고 다녔다고 한다.
한 달 새 두 명의 민간 출신 금감원장이 낙마했음에도 교수 출신인 윤 원장이 취임한 것은 그만큼 문재인 대통령이 ‘금융개혁’을 중시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은 김기식 전 원장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자 직접 작성한 서면 메시지에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분야는 과감한 외부 발탁으로 충격을 줘야 한다는 욕심이 생긴다”고 밝힌 바 있다.
내정 소식 이후 말을 아끼던 윤 원장은 이날 취임 일성으로 “금융감독의 본질은 위험관리”라면서 “금융감독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독립성 유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를 놓고 상위기관인 금융위원회에 사실상 선전포고를 한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필요하다면 금감원이 금융위에 반기를 들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금융혁신의 주도권이 금융위에서 금감원으로 확실히 넘어갈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 과정에서 윤 원장이 양 기관의 갈등을 잠재우는 역할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윤 원장은 학자 시절 금융위를 해체하고 금융산업 정책은 기획재정부로, 감독 정책은 민간 공적 기구로 이관하는 금융감독 체계 개편을 주장한 바 있다. 현재의 금융감독 체계로는 금감원은 금융위가 만든 제도와 규정의 틀 안에서 검사와 감독을 하는 집행자일 뿐이다. 금융위 산하기관인 금감원의 수장이 금융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지적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제각기 다른 것처럼 보이는 대통령과 금융 업계가 생각하는 금융개혁의 접점을 찾는 것도 윤 원장의 역할이다. 문 대통령의 그동안의 발언을 살펴보면 금융권의 갑질이나 부당 대출 등으로 금융 소비자, 특히 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는 것을 금융혁신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금융 분야 각각의 플레이어들이 활약할 수 있도록 제도와 환경을 만들어 이들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금융혁신이라고 주장한다. 금감원 수장 한 명을 교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국정 운영 차원에서 제도 개선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해달라는 주문이다.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현장에서 감독과 검사를 하는 금감원이 제도와 현실의 괴리를 찾아내 감독규정을 개선하는 금융혁신을 꾀하는 것이다. 윤 원장이 밝힌 대로 금융감독이 제대로 돼야 정부가 올곧은 금융산업 정책을 펼치고 금융회사들이 금융 상품 및 서비스 개발에 전력해 금융 소비자들이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백팩을 멘 윤 원장이 민간 출신 금감원장 잔혹사를 종식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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