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이 암호화폐 거래 실명제를 도입한 지 100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법인계좌를 통한 이른바 ‘깜깜이 거래’가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금융당국이 실명계좌 발급 문제가 은행과 암호화폐 거래소 간 해결할 일이라며 어정쩡하게 뒷짐을 지고 있는 사이 후발 거래소들이 난립하며 암호화폐 거래 시장이 음성화되고 있다.
9일 암호화폐 업계에 따르면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는 현재 영업을 하고 있거나 준비 중인 업체까지 합치면 100곳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지난 1월 김용범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가상통화 실명확인 입출금계정 서비스’ 실시를 발표하면서 “군소 취급업소(거래소)가 60여개에 달한다”고 설명했는데 실명제 시행 이후 100일 만에 40개가 더 늘어난 셈이다. 이제는 일반인들도 익숙한 업비트나 빗썸·코인원·코빗 등과 같은 상위 암호화폐 거래소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듣도 보도 못한 거래소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난립하고 이들이 감독 사각지대에 놓여 새로운 사회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문제는 업비트·빗썸·코인원·코빗 등 빅4 거래소를 제외한 업체들 가운데 은행으로부터 실명계좌를 발급받은 곳은 전무하다. 심지어 업비트도 현재 신규 회원을 대상으로 실명계좌를 발급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에 중소 거래소들은 법인계좌나 암호화폐간거래(C2C)를 통해 서비스를 운영해야 하는 실정이다. 금융 당국은 법인계좌를 통한 거래가 자금흐름이 불투명해 자금세탁 등 불법행위에 악용될 소지가 높다고 지적해왔다. 실제 암호화폐 거래소 코인네스트의 대표가 횡령·사기 혐의로 구속 상태다.
암호화폐 업계는 당국이 거래소와 은행 간 문제로 실명계좌 발급을 떠넘기면서 롤을 하지 않다 보니 오히려 국내 암호화폐 시장이 기형적으로 방치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 해외 거래소가 국내에 진출하는 등 업체가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지만 대부분이 실명계좌가 아닌 법인계좌나 코인끼리 교환하는 방식의 C2C로 거래하고 있다. 기존에는 원화를 입금해 코인을 사고 파는 거래가 주로 이뤄졌지만, 은행으로부터 실명계좌 발급이 어려워지면서 후발 거래소들이 코인간 거래인 C2C로 대안을 찾고 있는 것이다. 금융당국은 암호화폐 거래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실명제 도입을 강제하고 있지만, 후발 거래소들이 각종 편법을 동원하면서 오히려 금융당국 스스로가 실명제 도입 취지를 퇴색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 중소거래소의 대표는 “보안이나 컴플라이언스 수준에서 합격점을 받았는데도 은행이 금융당국의 눈치를 보는 탓에 신규계좌 발급을 꺼리고 있다”며 “아예 후발 거래소들은 관련 업무로 은행관계자를 만나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라고 토로했다.
금융 당국은 은행이 발급 여부를 자체적으로 판단하라면서도 신규계좌를 내줄 경우 집중 점검대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은행 입장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눈치만 보는 상황이다. 올해 초 최흥식 전 금감원장은 이 같은 업계의 애로를 전해 듣고 “은행들이 신규계좌를 발급하도록 독려하겠다”고 발언했다가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후 금융당국의 입장은 더욱 중립적이 됐다는 후문이다.
금융 당국은 암호화폐 거래소에 대한 직접적인 감독 권한이 없어 은행을 통해 간접적으로 실태를 점검하고 있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미국에서도 뱅크오브아메리카(BoA)나 JP모건체이스 등 대형 은행에서는 리스크가 높다며 거래소에 계좌를 발급해주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일부에서는 금융당국이 빅4 중심의 거래소를 유지하면서 중소 거래소들을 자연스레 고사(枯死)시키려 한다는 분석도 나오지만 법인계좌를 통한 거래 횡행 등 부작용이 더 커지는 상황이 됐다. 이 때문에 해외 거래소들도 한국 시장으로 일제히 몰려들고 있어 시장을 더 교란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일본이나 미국의 암호화폐 관련 규제가 강화되면서 해외 거래소들이 규제 무방비 상태인 한국 시장을 노리고 있다”면서 “지금 상태를 유지하다가는 국내 암호화폐 시장을 투명하게 만들기는 더 어려울 것”이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