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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단독인터뷰①]김경익, ‘미투’ 어느 날 갑자기는 없다

이윤택 ‘미투’ 이후..‘뭉개는 삶은 결국 썩는 것’ 깨달아

연희단 해체 소식에 ‘정말 이게 당신 것이라 생각한 건가?’ 묻고 싶어




무역회사를 다니던 20대 평범한 청년은 연극을 처음 만나고, 세상에 눈을 떴다. 그리고 바로 그 세계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12년 뒤 연극을 알게 해준 스승을 떠났다. 25년 뒤엔 그를 ‘마음 속에서 추방’ 시켰다고 했다.

영화 ‘박하사탕’(1999)에서 설경구에게서 고문을 받는 운동권 대학생이자 영화 ‘타짜’(2006)에서 정마담을 지키던 오른팔 빨치산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배우 김경익 이야기이다. 1968년생 오달수와 동갑내기로 연희단거리패에서 오랜 시간 함께 해 왔으며, 곽도원(곽병규)과도 함께 극단 생활을 했다.

김경익 연출 겸 배우는 “아닌 걸 알면서도 ‘뭉개는 삶은 결국 썩는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김경익 연출 겸 배우는 “아닌 걸 알면서도 ‘뭉개는 삶은 결국 썩는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우리극연구소 1기 김경익은 1994년 1월, 배우로 데뷔했다. 연극 ‘햄릿’ ‘오이디푸스’ ‘어머니’ 등에 출연하며 약 12년간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과 연극 세계를 공유하며 ‘포스트 이윤택’으로 불렸다. 이대표가 자리를 비우면 연출 자리를 떠맡는 등 연출 쪽 경력을 꾸준히 쌓아온 스태프 출신이기도 하다. 이후 2006년 연희단거리패와 결별, 2012년엔 극단 진일보를 창단해 연극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2월 초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을 중심으로 하용부 밀양연극촌 촌장등이 극단원들을 성추행하고 유사강간한 혐의가 폭로되며 연극계 ‘미투(#MeToo)운동’ 열풍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배우 겸 연극 연출가 김경익을 만나, 연희단거리패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가 꿈꾸는 연극의 세계에 세계에 대해 직접 들었다.

다음은 연극인 김경익과의 일문일답이다.



Q. 연극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A. 28세까지 일반 직장을 다니다가 무작정 연극계에 뛰어들었다. 무역회사를 다니다 ‘이대로는 못살겠다’ 는 생각이들어 때려치고 나왔다. 우리극연구소 1기로 들어가면서 이윤택 선생님을 만나게 됐다.

Q. 연희단거리패 이윤택 연출에게 배운 점이라면?

A. 저는 대한민국 연극 판에서 연출이 연출을 키우는 케이스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이윤택 선생님이 저를 키워주셨다. 제가 연출지망생인 걸 알고 선생님이 연극 1년차 때부터 연출을 시키셨는데, 그때부터 제가 극단을 그만둘 때까지 제 연출작품에 개입해서 터치하지 않으셨다.

선생님은 제가 첫 연출 하기 전날, 제 연습을 보며 뭘 바꾸라 이야기 해주시고선 그 뒤론 단 한번도 제 연습하는데 개입해서 말 하지 않으셨다. 물론 공연이 올라간 뒤 보고는 이야기하지만, 하기 전엔 이야기하지 않으셨다. 사실 연출이 다른 연출의 말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되면 호흡이 바뀌는 게 있다.

운 좋게 2001년에 제가 연출한 연극 ‘봄날은 간다’ 가 동아연극상을 받았다. 10년 짬밥을 함께 먹었던 김소희, 이승헌 배우가 같이 들어가 합을 맞추니까 더 호흡이 살아난 것도 있다. 그게 졸작이었지만 잘 봐주신 게 저건 이윤택의 호흡이 아닌 저 만의 호흡이었다는 점이다. 얘네들은 연출이 만들어지는 곳이네라고 알려지게 됐다. 그래서 아직까지 그 부분은 되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Q. 한 때 ‘포스트 이윤택’이란 말을 들었다. 하지만 2006년경 돌연 연희단거리패 극단을 나왔다.


A. 2003년부터 극단을 왜 만들어야 하는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이윤택 선생님이 생각하는 연극의 마지막 지점이 나와 맞지 않았다. 선생님이 만들려는 세상과 선생님이 부재할 때의 세상의 그림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겐 그게 반역처럼 보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극단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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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포스트 이윤택’이란 말을 듣기도 했던 김경익 연출 겸 배우는 2006년경 연희단거리패를 나왔다.한 때 ‘포스트 이윤택’이란 말을 듣기도 했던 김경익 연출 겸 배우는 2006년경 연희단거리패를 나왔다.


Q. 이윤택씨가 만들려는 세상과 달랐다?

A. 우선은 선생님의 카리스마와는 다른 극단 내 질서를 원했다. 전 배우 1년차 때부터 연출 작업도 같이 하고 있어서, 제가 연출로서 배우들과 함께 작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점점 연희단거리패는 선생님 중심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걸 확인했다. 다른 질서가 필요 없을 정도로. 제가 다른 질서를 제시해봤자, 배신의 싹이자 균열의 싹이 되는 것 같았다.

또한 극단 규모가 커지면서 전 선생님에게 제안을 했다. 15년 차 이상인 배우들에게 대졸 초임 정도의 임금 정도를 지급해서 안정되게 해야 한다고 말씀드린거다. 신입단원들은 3년, 5년차, 수련 과정을 거쳐서 정식 단원으로 영입하던 시절이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도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Q. 임금 문제보다 더 중요한 건, 이윤택씨와 김경익씨가 그린 연극 공동체 삶의 기준이 달랐다는 의미인가.

A. 저는 무조건 여러 명이 모여서 극단을 만든다고 해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 단원이라고 해서 진정한 의미의 극단이 만들어진다고 보지 않는거다. 세상을 바라보고 같이 갈 동지가 필요한 거다. 인해전술처럼 많은 인원이 모여서 30년간 같이 한다는 건 필요없다. 그렇게 모여 있어봤자 기본적인 봉급을 줄 수 있나? 결국 이러 저러한 이유로 서로 떠나야 한다. 하지만 10년 동안 그렇게 뜻을 같이하는 동지가 10명이 모이면 대학로가 바뀔거라 생각한다.

Q. 극단을 나가겠다고 의사표시를 하자, 이윤택씨가 한 말은 무엇이었나?

A. 제가 나가겠다고 할 때 하신 말은 ‘가슴이 찢어진다.’ 였다. 이미 선생님도 제가 결심이 선 걸 아시고 크게 말리시진 않으셨다. 당시 서울 게릴라극장 극장장이었는데, ‘다시 밀양에서 해라’ 고 제안을 하시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정말 숙소에 있던 옷 가방을 들고 나왔다.

Q. 옷가방을 들고 12년간 몸 담았던 극단을 나올 때 심경을 좀 더 이야기해달라.

A. 특별히 유별나게 나온 건 아니다. 그렇게 일기를 썼던 건 기억난다. 지금까지 비디오 일기, 작업 일기, 독서 일기 등 여러 일기를 써오고 있는데, 특별한 날은 좀 더 그 때의 심경을 적어놓는다.

그 때 일기에 ‘익숙한 곳이라도 뭉개면 큰일난다.’고. 아기는 엄마 뱃 속에서 10개월을 보낸다. 가장 편하고 익숙한 곳이 그곳이지만 때가 되면 나와야 한다. 마찬가지다. 내가 익숙한 곳이 연희단거리패였고, 게릴라 극장장 자리였다. 그렇다고 아닌 걸 알면서 뭉개면 이건 둘 다 죽는 일 아닌가. 그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연극을 시작 할 수 있었고, 또 연극을 알게 해준 선생님을 떠날 수 있었다.

Q. 이윤택씨 사건은 극단에 몸 담고 있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건인가?

A. ‘어느 날 갑자기’는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이윤택이 악마가 되고, 어느 날 갑자기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어느 날 갑자기 세월호가 가라앉았나. 그런 의미다. 다 그 정도는 하고 살잖아라고 생각하며 보냈던 시간들이 무너진 거다. 엉덩이로 눌러앉은 패악이 곯고 곯으면 어떤 사건이 터지게 된다. 내 주변의 불합리를 못 본 척 뭉개고, 당연히 여기고, 심지어 그것을 통해 개인의 욕망을 채우는 일은 언젠가 차곡차곡 쌓여서 ‘어느 날 갑자기’ 일이 터진다. 지금 내 주변에 흘러가는 한 순간, 한순간에 깨어 있어야 한다. 뭉개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가 생기는거죠. 결국 시간이 지나고 보니 ‘뭉개는 삶은 결국 썩는 것’이란 생각이 확실해졌다.

Q. 사건 이후 이윤택씨와 연락 한 적은 있나?

A. 연희단거리패가 해체한다는 소식까지 알게 되고 선생님께서 전화를 걸어오셨다. 다른 무엇보다 ‘극단을 왜 깨셨냐?’ 고 물어보니, ‘내가 깬 게 아니다. 대표는 김소희야.’라고 하셨다. 그래서 제가 ‘선생님 허락 없이 김소희가 깰 수 있나요? 제가 과거 연희단에 있었잖아요’ 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주 넌지시 ‘죗값을 받으세요. 그리고 피해 받은 이들을 위해 뭔가를 해주셔야 해요. 당신과 함께 연극을 했던 이들을 위해 뭔가를 하셔야 해요.’ 라고 말했다. 하지만 못 알아들으셨다.

Q. 극단 해체 이후 더 이윤택씨의 실체를 정확히 알게 된 것 같다.

A. 지금까진 이윤택과 연희단이 (극단으로)섞여있을지 몰라도 해체 이후 확실히 알게 됐다. 우리 일이 아니라 ‘그’의 일인 게 확실한거니. 필요 없을 땐 깨버린 집단, 극단을 팔 수 있는 사람이 한명이면 극단인가. 개인 것이지. 어떤 누가 이윤택 한 사람을 위해 몸 바치고 시간 바치고 그 많은 시간을 살았겠나. 도대체 어떤 놈이...당신도 고생했지만 극단의 수 많은 애들이 죽기 살기로 고생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연희단이 올 수 있었던 거다. ‘정말 이게 당신것이라 생각한 건가?’ 라고 묻고 싶다. ‘이젠 구제가 안 되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당신을 마음 속에서 추방 시켰다.

정다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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