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직은 모든 걸 조심스러워했다. ‘정통 엘리트 금융관료’나 ‘모피아 적자’ ‘비운의 황태자’ 등 자신에게 따라다니는 수많은 수식어를 의식한 것이다. 김석동·신제윤·임종룡 전 금융위원장 등 쟁쟁한 모피아 선배를 잇는 부담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김광수(사진) NH농협금융 회장은 사석에서도 관료 선배이자 전임 회장의 ‘업적’을 언급하며 너무 무리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소극적이지도 않게 맡은 소명을 잘 수행하겠다는 뜻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취임 3주 차를 맞는 김 회장을 서울경제신문이 15일 만났다. 오전6시30분 출근길에서다. 얼굴은 환해 보였지만 간단한 소회를 묻는 질문에 ‘막중한 책임감’부터 언급했다. 그러나 너무 무리하게 조직을 이끌 생각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김 회장은 아이패드로 그날의 주요 일정부터 확인했다. 지난주 말에는 NH농협은행의 올원뱅크에 가입해 송금이나 이체 등 다양한 서비스를 직접 체험했다. 그리고 나서 업무보고를 받을 때 “올원뱅크 펀드 서비스의 경우 컴플라이언스(규정)가 많아 번거롭고 중단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여서 이로 인해 이탈하려는 고객까지 끌어들이는 유인책이 필요하다”며 송곳 지적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긴 공백이 무색하게 핀테크나 빅데이터 같은 4차 산업혁명에 대한 통찰력도 깊어 보였다. 김 회장은 “디지털 부문 발전에 있어 정보통신기술(ICT) 인력의 원활한 수급이 중요하므로 외부 인력을 적극 영입하고 이들이 이질감을 느끼지 않도록 승진 인센티브를 고려해야 한다”며 대대적인 조직의 디지털 전환을 예고했다. 김 회장이 취임사에서 밝힌 “업무 프로세스를 세부적으로 점검해 스마트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낡은 업무 관행이 있다면 전면적으로 혁신하겠다”는 발언과 연장선이다. 그는 “전문가 양성 프로그램을 잘 정착시켜 육성한 인재의 외부 유출을 방지해야 한다”고도 했다.
관료(행시 27회) 출신으로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과장·금융서비스국장, 금융정보분석원장 등을 맡았던 김 회장은 지난 2014년 5월 관직에서 물러난 뒤 지난달 30일 NH농협금융지주 회장으로 4년 만에 화려하게 컴백했다. 업무보고를 비롯해 각종 일정들로 빡빡한 하루를 보내면서도 현장을 찾아 소통하겠다는 게 김 회장의 철학이다. 취임식 직전에 농협은행 노조를 방문해 현장에 있는 직원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은 것은 이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김 회장은 “계열사 업무보고를 받은 뒤 현장 경영을 본격화할 것”이라며 “현장을 찾아 실무자를 자주 만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전날 생명을 시작으로 이날은 은행·카드·보험 최고경영자(CEO)들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 등 7개 자회사 간담회를 마치고 향후 2년 로드맵을 구체화할 계획이다. 이후에는 영업점, 지역 현장 등을 주로 방문할 예정이다. 김 회장은 “내 전화는 항상 열려 있다. 지주는 군림하는 게 아니다. 언제든 애로사항을 편히 연락하라고 임직원들에게 얘기하고 있다”며 열린 경영, 현장 경영을 거듭 강조했다.
지주사의 역할에 대해서는 계열사 간 협업을 통해 시너지를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살아 있는 유기체인 자회사의 역량을 끌어올려야 한다”며 “기본적으로 자회사가 자기 소임을 다해야겠지만 지주는 자회사가 무얼 할 수 있나 도와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NH농협금융의 경우 은행 비중이 75%에 달할 정도로 은행·비은행 간 편차가 크다. 이 때문에 김 회장도 자회사 이익을 끌어올릴 로드맵을 구상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김 회장은 “이제 시작이라 그 부분은 아직 잘 모르겠다”며 즉답을 피했다.
글로벌 사업은 농업을 기반으로 실물을 지원하는 농협만의 협업모델 진출방식과 해외 거점지역 중심의 진출전략을 유지할 방침이다. 중국 공소그룹과의 은행·보험 합작사 설립도 속도를 낼 계획이다. 오는 7월부터는 미얀마법인(농협파이낸스미얀마)을 통해 미얀마 최대 기업인 투(HTOO)그룹과 손잡고 농기계 할부금융사업을 추진한다. 김 회장은 “전임 (김용환) 회장이 잘해놓아서 큰 변화 없이 지금까지 하던 정책을 계승해나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사회적 책임 확대에 대해 김 회장은 “미국의 지역재투자법 개념을 생각해봐야 한다”며 운을 뗐다. 지역재투자란 특정 지역에서 예금을 받는 금융사가 해당 지역에서 번 이익의 일부를 환원하도록 의무화하는 제도다. 우리나라에 관련 법은 없지만 유사하게 지역 저소득층 및 중소기업 등의 대출 수요에 적극 대응하는 식으로 농협의 역할을 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초대형 투자은행(IB)에 대해서는 기대감을 나타냈다. 김 회장은 “지주사 지배구조 검사를 마쳤으니 감독당국에서 다음 절차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이달 말 NH투자증권의 단기금융업 인가를 낼 것으로 전망된다. 업계에서는 관료 출신으로 금융당국과의 소통이 원활한 김 회장의 네트워크가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를 통해 계열사 중 수익 기여도가 두 번째인 NH투자증권이 비은행 계열사의 경쟁력을 끌어올려 은행과 비은행 부문 균형을 맞출 촉매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금융권은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