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얼굴이 주먹만 해요.” “10년 넘게 왕팬이에요, 같이 사진 한 장만 부탁드려요.”
‘초롱이’ 이영표(41)의 인기는 현재 진행형인 것 같았다. 영리하고 근성 넘치는 플레이로 기억되는 이영표는 지금까지도 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왼쪽 풀백으로 손꼽힌다. 아시아를 통틀어서도 첫손을 다툰다. 2002한일월드컵 이후 PSV에인트호번·토트넘·도르트문트 등을 거쳐 2013년 미국 메이저리그사커 밴쿠버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아직도 그를 그리워하는 축구 팬이 많은 이유다.
2014브라질월드컵부터는 KBS 해설위원으로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월드컵·올림픽 등 굵직한 대회에서 모두 시청률 1위를 달렸다. 차분한 목소리와 분석적인 해설이 그의 트레이드마크. 그를 최근 KBS 2TV의 월드컵 특집 예능 프로그램 ‘볼쇼이영표’ 녹화현장에서 만났다. 이 위원은 16년 전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영광스러운 추억을 회상하기보다는 2018러시아월드컵에서 후배들이 새로운 신화를 써주기를 열망하는 표정이었다. 경기 고양의 한 식당에서 이뤄진 녹화에 이 위원이 대표팀 12번 유니폼을 입고 등장하자 한 무리의 팬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러시아월드컵 첫 경기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3주 남짓. 이 위원은 2002월드컵 4강과 2010남아공월드컵 16강에 앞장섰던 대표팀 선배이자 해설위원으로서 진심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발’보다 ‘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소집훈련 내내 무엇보다 서로 많이 얘기를 나누면 좋겠어요. 바로 옆에서 뛰는 동료들과 ‘나는 이럴 때는 이렇게 플레이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식으로 계속 대화를 해야 해요. 많은 대화는 실제 경기 때 상당히 큰 도움이 됩니다. 훈련하면서 궁금한 게 있어도 묻지 않거나, 요구하지 않거나, 질문하지 않으면 안 돼요. 내 생각과 다른 장면이 나왔을 때 지체 없이 의견을 주고받는 활동은 아주 중요합니다.”
공격자원들의 줄부상도 문제지만 이번 대표팀의 가장 큰 걱정은 수비 불안이다. 이 위원은 “수비수는 상대 공격수에 반응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며 “공격에 비해 어차피 불리한 게 수비인데 그 불리함을 이겨내는 것은 결국 조직력”이라고 했다. “상대가 1명이라면 우리는 2명, 2명 들어오면 3명 식으로 숫자에서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위기를 벗어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항상 우리 숫자가 상대 숫자보다 많게 공간을 장악하는 거죠. 그러려면 많이 뛰어야 합니다. 공 주위 공간에 빨리 접근하고 도와줘서 숫자 싸움을 유리하게 가져가는 훈련을 많이 해야 하고 그게 바로 조직력인 거죠.” 같은 포지션(왼쪽 풀백)의 후배들을 향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상대 공격의 집중 타깃이면서 우리 공격의 출발점인 포지션인데 첫 번째 임무는 어디까지나 수비입니다. 그런데 수비 안정은 혼자서는 힘들어요. 앞에 있는 윙포워드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항상 간격을 유지할 수 있도록 주변 미드필더, 중앙수비수와 커뮤니케이션해야 합니다. 나를 도와줄 선수가 내 주변에 항상 있을 수 있게 하는 것, 이게 핵심입니다.” 이 위원은 현역 시절 자신의 경험을 곁들이며 “공을 못 잡게 상대가 저를 압박하면 우리 공격은 중앙으로 몰린다. 그러면 상대 역습 때 나는 허겁지겁 수비에 가담하느라 체력이 고갈된다”며 “반대로 풀백인 내게 공간이 많이 주어지고 패스가 살아나면 자연스럽게 팀도 이기는 경기를 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 위원은 선수 간 활발한 소통과 함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현시점에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월드컵은 역사로 남기 때문에 만약 실수를 하면 그 실수로만 영원히 기억될 수 있다. 선수라면 그런 부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심이 있게 마련인데 이것 또한 결국 동료들과 많은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했다. 특유의 헛다리 드리블과 정확한 오른발 크로스, 악바리 같은 수비로 유명했던 이 위원은 월드컵 역사에 결정적인 2개의 어시스트로 기억되고 있다. 2002월드컵 조별리그 포르투갈전에서 박지성의 결승골을 도왔고 거함 이탈리아를 상대한 16강에서는 안정환에게 연장 골든골을 배달했다. ‘좌영표-우(송)종국’ 라인은 한국 축구 역대 최고의 윙백 라인으로 평가받으며 박지성-이영표의 왼쪽 라인도 ‘역대급’으로 통한다.
현재 대표팀 후배들 중 기성용(스완지시티)·구자철(아우크스부르크)·박주호(울산)·장현수(FC도쿄) 등을 경기장 안팎에서 팀의 중심을 잡아줘야 할 정신적 지주라고 꼽은 이 위원은 “월드컵 같은 큰 무대에서는 상대적으로 기대감이 높지 않던 선수가 깜짝 활약을 해줘야 좋은 성적으로 이어지는 법인데 장현수 같은 수비수들이 큰일을 낼 수도 있다”고 했다.
대표팀 에이스이자 토트넘 후배인 손흥민을 바라보는 눈길에도 애정이 가득하다. 2011년 아시안컵은 이 위원의 대표팀 은퇴 대회이자 손흥민의 대표팀 데뷔 대회였다. 이 위원은 “손흥민은 당시 아시안컵 때도 빠른 발과 적극적인 슈팅으로 눈에 확 띄었다. 그렇지만 그때가 완성돼가는 과정의 선수였다면 7년이 지난 지금은 지난 2년간의 기록만 보더라도 세계 톱클래스 윙어 중 한 명이 됐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고 칭찬했다.
이 위원은 조별리그 첫 상대 스웨덴을 멕시코보다는 비교적 편한 상대라고 평가했다. “기본 포메이션이 4-4-2인 스웨덴은 신체조건은 월등하지만 민첩성 면에서는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상대”라는 설명. 더불어 “포백·스리백 전술에 두루 능하고 좌우 윙백이 줄기차게 공격에 가담하는 멕시코는 힘든 상대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 위원은 브라질월드컵 당시 신통한 예측으로 ‘문어영표’라는 별명을 얻었다. 2010남아공월드컵 때 독일 대표팀의 경기 승패를 족집게처럼 맞힌 점쟁이 문어 ‘파울’에 빗댄 것이다. 이 위원은 칠레의 스페인전 승리를 맞혔고 이탈리아-잉글랜드전과 코트디부아르-일본전의 경우 승패는 물론 스코어까지 정확히 맞혔다. “이근호가 한 건 할 것”이라고 전망했던 러시아전에서 이근호는 선제골을 넣었다. 문어영표는 이번 대회 우승 1순위로 프랑스를 꼽으며 최고 스타로 떠오를 선수로 역시 프랑스의 킬리앙 음바페(파리 생제르맹)를 찍었다. 돌풍을 일으킬 팀으로는 이란을 꼽았다. “브라질월드컵 때도 나이지리아랑 비기고 아르헨티나에 0대1로 아깝게 졌거든요. 이번의 이란은 뭔가 다를 것 같아요.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랑 같은 조라 쉽지 않겠지만 눈여겨봐야 할 팀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은퇴 후 이 위원은 밴쿠버 화이트캡스 앰배서더(대사)로 구단 운영 등을 배우며 축구 행정가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감독보다는 행정가에 관심이 간다고. 지금은 캐나다와 한국을 오가며 ‘뭔가 다른 일’을 진행하고 있는데 그 뭔가가 무엇인지는 아직 말하기 이르지만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고 했다. 10년 뒤 이영표의 모습을 그려달라는 요청에 그는 “축구와 관련된 일이든 아니든 선수 때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며 웃었다. /고양=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 사진=송은석기자
He is
△1977년 강원 홍천 △1999년 코리아컵서 성인 대표팀 데뷔 △2000년 건국대 정치외교학 학사 △2000년 프로 데뷔(안양 LG) △2000년 시드니올림픽 대표 △2002년 한일월드컵 대표 △2002년 체육훈장 맹호장 △2003년 PSV에인트호번 △2004년 네덜란드리그 베스트11 △2005년 토트넘 홋스퍼 △2006년 독일월드컵 대표 △2006년 BBC 선정 독일월드컵 세계 톱10 수비수 △2008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2009년 알 힐랄 △2010년 남아공월드컵 대표 △2011년 카타르 아시안컵서 국가대표 은퇴 △2011년 밴쿠버 화이트캡스 △2012년 밴쿠버 올해의 선수상 △2013년 현역 은퇴 △A매치 127경기 5골 △2014년 KBS 해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