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明鏡止水] 바로 지금 여기서 이것뿐!

월호스님·조계종 행불선원 선원장

늙고 죽음에 철저히 마주하는 게

생로병사서 벗어날수 있는 방법

모자람을 통해 충만함을 느끼듯

항상 바로 지금 여기서 감사하라




“당신의 스승은 누구십니까? 또한 그분은 무얼 설하십니까?”


사리자의 이러한 질문에 앗사지 존자는 답했다.

“저의 스승은 샤카무니 붓다이십니다. 그분은 이렇게 설하십니다.”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다네. 여래께서는 그 원인에 대해 설하신다네. 원인이 소멸한 결과에 대해서도, 여래께서는 또한 설하신다네.”

이 게송(揭頌·불교적 한시)을 들은 사리자는 전율을 느꼈다. 마침내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진리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앞의 두 구절은 그 자리에서 알 수 있었지만, 뒤의 두 구절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곧바로 출가를 결행해 마침내 3주 만에 뒤의 두 구절 또한 확실하게 깨칠 수 있게 됐다.

인간은 누구나 늙고 죽는다. 그렇다면 ‘늙고 죽음’이라는 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병고에서 벗어나려면 병의 원인을 알아야 하는 것처럼, 늙고 죽음에서 벗어나려면 늙고 죽음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 늙고 죽음의 원인은 무엇일까. 궁극적으로 ‘내’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있으므로 ‘나의 늙고 죽음’이 있는 것이다. 결국 늙고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은 ‘내’가 사라지는 것이다.


내가 사라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죽음을 ‘나의 사라짐’으로 생각하지만, 죽음은 단지 ‘내 몸’의 사라짐일 뿐이다. 몸이 사라진다고 해서 마음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여전히 남아서 자신의 인연에 합당한 과보(果報)를 받는다. 그러므로 몸은 물론 마음까지 사라져야 진정한 ‘나’의 사라짐인 것이다. 이 마음은 흔히 생각이라고 표현되는 시비 분별하는 마음을 말한다.

관련기사



그렇다면 시비 분별하는 생각을 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좋은 방법은 대면관찰(對面觀察)이다. 즉 자신의 생각을 거울 보듯 영화 보듯 강 건너 불구경하듯 대면해서 관찰하되, 닉네임을 붙여서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그 생각은 더 이상 ‘나의 생각’이 아니라 ‘닉네임의 생각’이 된다. 어떠한 생각이든 닉네임의 것으로 객관화시켜 관찰하면 정작 나는 관찰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이 관찰자가 바로 성품이다.

몸과 마음은 생멸하지만 관찰자인 성품은 생멸하지 않는다. 예컨대 종을 치면 그 소리는 일어났다 사라지지만, 그 소리를 듣는 성품은 생겨났다 없어지지 않는다. 그 자체로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잠을 잘 때 눈을 감고 자더라도 꿈속에서는 여전히 보고 듣는다. 육신의 눈은 감고 뜨지만 성품은 감고 뜨지 않는다. 항상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관찰자인 성품은 스스로를 볼 수는 없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거울과 같은 대상이 없이는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관찰자는 스스로 대상을 창조한다. 마치 푸른 하늘에 구름이 일어나듯이, 몸과 마음이라는 대상을 창조해 자신을 실감 나게 알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늘과 구름이 둘이 아니듯이, 관찰자인 성품과 관찰의 대상인 몸과 마음 또한 둘이 아니다.

이러한 차원에 도달하게 되면, 늙고 죽음의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다시 말해 몸과 마음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인 늙고 죽음을 벗어난다는 것은 결국 늙고 죽음에 철저해지는 것이다. 철저히 늙고 철저히 죽는 것이다. 생(生)이 오면 생과 마주하고, 사(死)가 오면 사와 함께한다. 늙어갈 땐 늙어갈 뿐! 죽을 땐 죽을 뿐!

선사들은 말한다.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잔다.’ 겉보기에는 범부들과 다름없지만 그 내용은 사뭇 다르다. 범부들은 밥 먹으면서 오만가지 번뇌 망상을 하며, 잠자면서 갖가지 꿈을 꾼다. 몸과 마음이 나누어지고 현상과 본성이 이원화된다. 하지만 선사들에게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다. 현상과 본성도 둘이 아니다.

결국 생로병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해졌다. 태어날 땐 태어날 뿐! 늙어갈 땐 늙어갈 뿐! 아플 땐 아플 뿐! 죽을 땐 죽을 뿐! 항상 바로 지금 여기서 완전연소할 뿐이다. 이것이 현상에 철저하면서 본성으로 돌아갈 수 있는 비법이다.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대면관찰을 해야 한다. ‘달마가 태어났다’ ‘달마가 늙어간다’ ‘달마가 병들었다’ ‘달마가 죽어간다’. 이렇게 닉네임을 붙여 관찰하면 생로병사는 달마의 것이 되고 정작 자신은 크고 밝고 충만한 관찰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하지만 ‘큼’만 있을 때는 ‘큼’을 알 수 없다. ‘밝음’만 있을 때는 ‘밝음’을 알 수 없다. ‘충만함’만 있을 때는 ‘충만함’을 알 수 없다. 작고 어둡고 모자람을 통해 크고 밝고 충만함을 실감 나게 체험할 수 있다. 그러니 작고 어둡고 모자람을 원망하거나 한탄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작음을 통해 ‘본래 큼’을, 어두움을 통해 ‘본래 밝음’을, 모자람을 통해 ‘본래 충만함’을 실감할 수 있으니 감사하고 감사할 뿐이다. 항상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것뿐!’인 것이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