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명 대신 성분명으로 의약품을 처방하는 ‘성분명 처방’이 또다시 약사계와 의료계의 기득권 싸움으로 비화될 조짐이다. 대한약사회는 기존 제품명 처방 대신 성분명 처방을 의무화해 국민의 의약품 접근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대한의사협회는 의약분업의 본질을 훼손하고 국민 건강권을 위협하는 조치라며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28일 업계에 따르면 대한약사회는 지난 26일 대전에서 전국여약사대회를 열어 성분명 처방의 법제화를 촉구했다. 1,000여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에서 여약사들은 “국민의 의약품 선택권을 보장하고 건강보험 재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성분명 처방을 조속히 의무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덕원 대회장 겸 대한약사회 부회장은 “환자 중심의 의약품 정책을 정착시키고 급변하는 보건의료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성분명 처방은 필수적인 제도”라고 말했다.
앞서 대한약사회는 지난해 9월 서울에서 열린 세계약사연맹(FIP) 총회에서도 성분명 처방을 도입하는 것이 시급하다며 성분명 처방 의무화를 위한 입법개정에 착수했다. 이달 초에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성분명 처방의 법제화가 시급하다는 게시글이 올라오는 등 성분명 처방 도입을 위한 약사계의 집단행동이 가시화되는 분위기다.
성분명 처방은 의사가 환자에게 의약품을 처방할 때 특정 제품명이 아닌 성분명을 명기하는 제도다. 현재 제품명 처방에서는 발기부전 환자에게 의사가 ‘비아그라’를 처방하면 약사는 원칙적으로 동일한 제품을 판매해야 한다. 성분명 처방이 도입되면 비아그라의 주성분인 ‘구연산실데나필’로 처방할 수 있어 비아그라의 복제약인 ‘팔팔’ ‘누리그라’ ‘센글라’ 등으로 약사와 환자의 선택권이 넓어진다.
성분명 처방은 현재도 제도적으로는 운영 중이다. 하지만 의무사항이 아닌 선택사항인 탓에 일선 병원에서 성분명 처방의 시행률은 미미하다. 성분병 처방을 활성화하기 위해 약사가 대체약을 조제한 뒤 사전 또는 사후에 의사에게 보고하는 대체조제 제도도 도입했지만 이 역시 시행률은 0.1% 수준에 그치고 있다.
약사계는 성분명 처방을 의무화하면 약가가 저렴한 복제약 시장이 활성화되고 국민이 원하는 약을 선택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또 연간 2,000억원 안팎에 달하는 일선 약국의 재고 의약품 폐기 문제도 해결되고 제약사의 불법 리베이트도 근절될 수 있다고 내세운다. 지난 2016년 건강보험정책연구원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우리 국민 53.6%는 성분명 처방이 필요하다고 답했고 19%는 현행 제품명 처방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의료계는 성분명 처방이 의약분업의 본질을 훼손하는 행위라며 반발하고 있다. 건강보험 재정 개선에는 별다른 효과는 없고 오히려 경쟁력을 상실한 재고 의약품을 처리하는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대한의사회 관계자는 “성분명 처방이 의무화되면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환자가 복용하는 약이 어떤 제품인지 알지 못해 예기치 않은 의료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성분명 처방을 놓고 약사계와 의료계가 또다시 대립각을 세우고 있지만 제도화되기까지는 상당한 진통이 걸릴 전망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성분명 처방 도입에 따른 장단점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감수하면서까지 서둘러 제도를 도입하기는 힘들다”며 “향후 공청회 등 사회적 공론화 과정을 거치고 여론을 충분히 수렴해 개선안을 마련해나갈 방침”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