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 만인소(萬人疏)

0215A39 만파



사도세자(장헌세자)가 뒤주에서 비극적인 삶을 마친 30년 후 영남 유생 이우가 정조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의 손에는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 벽파의 처벌을 강력히 요청하는 내용의 상소가 들려 있었다. 무려 1만57명의 유생이 서명한 연명 상소였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사상 최대의 연명 상소에 정조가 이우에게 직접 상소를 읽게 하는 파격을 행했지만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원이 더 늘어난 2차 상소도 마찬가지였다. 1792년 조선 최초의 대규모 집단 청원인 ‘만인소(萬人疏)’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조선 유생들은 조정 정책에 불만이 있을 때 상소로 의견을 피력했다. 이 중 가장 강력한 것이 1만명이 청원을 했다 하여 이름 붙여진 만인소. 그만큼 영향력이 셀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것이 1881년 일어난 ‘영남 만인소 사건’. 김홍집이 일본에 다녀온 후 청과 일본·미국과 연합하고 러시아를 멀리해야 한다는 ‘조선책략’을 고종에게 전했다는 소식에 유생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이만손을 소두로 1만여명이 위정척사와 개화 반대를 외쳤다. 유교 중심 사회의 경직성과 국제정세에 대한 무지의 결과가 만들어낸 이 만인소로 조선의 앞날은 더 우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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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력이 크다고는 하지만 만인소는 성공한 사례보다 실패가 더 많았다. 일곱 차례의 만인소 중 정책에 영향을 준 것은 영남 만인소 사건 단 한 번뿐이고 순조 때의 서얼 차별 철폐, 대원군 집권 시기의 서원 철폐 반대 등 나머지 여섯 건은 모두 실패했다. 시대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거나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그만큼 컸던 탓이다. 조선이 전 세계에 유례없는 소통 체계를 갖추고도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지역위원회(MOWCAP)가 31일 한국국학진흥원이 제출한 1855년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와 1884년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 등 2점을 조선 궁중현판과 함께 아태지역 목록에 새로 올렸다. 조선 유교 지식인들이 행한 공론정치의 민주적 정치과정 초기 사례라는 점을 평가했다는 것이 등재 이유다.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이것 말고도 더 있다. 아무리 소통과 공론 체계가 잘 갖춰져 있더라도 기득권을 버리지 않고 시대에 역행한다면 모든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만인소는 경고한다. /송영규 논설위원

송영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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