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시각]터키 참전용사와 현충일

조상인 문화레저부 차장




최근 다녀온 터키 출장에서의 일이다. 터키의 소도시 이스파르타를 방문한 원래 목적은 국제적 규모의 장미축제 때문이었다. 전 세계 장미 관련 제품 유통량의 65% 이상을 생산하는 곳인지라 외국 기자들의 취재 열기가 제법 뜨거웠고 그 같은 분위기가 현지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

다음날 취재 일정 중간에 예정에 없던 ‘한국전쟁 참전용사와의 만남’이 끼어들었다. 언론을 통해 ‘형제의 나라’ 한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접한 참전용사들이 “꼭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좀 귀찮았다.


한글이 적힌 훈장을 주렁주렁 가슴에 달고 후덥지근한 낮 기온이 무색한 털모자를 쓴 참전용사들은 후세인(90)과 파익(88), 뮤닐(88)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이스파르타에만 한국전 참전용사 생존자가 총 28명인데 그중 건강이 양호한 편인 3명이 “한국 사람들을 만나겠다”며 찾아온 것이었다. 현지 재향군인회와 가족들이 동행해 이들의 불편한 거동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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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갓 스무 살 안팎이던 이 ‘청년들’은 이름도 생소하고 어디 있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한국을 돕겠다며 배에 몸을 실었다. 4,500명이 배 세 척에 나눠 탔고 지중해를 출발해 인천항에 닿기까지 29일이 걸렸다. 배에서 내려 처음 만난, 며칠씩 굶은 한국 사람들을 보고서는 지급받은 군용도시락을 나눠 먹었더랬다. 터키에서는 상상도 못할 한겨울 추위와 싸워가며 전쟁에 참여했지만 나중에는 중국 군인들에게 밀렸다며 ‘1·4후퇴’ 당시를 회고했다.

대략 70년 전, 정확히는 68년 전의 기억을 되짚는 늙은 용사의 눈동자는 ‘여전히 생생한 기억’임을 말하고 있었다. 그 뒤로 단 한 번도 한국에 가볼 기회는 없었지만 늘 한국을 생각한다는 ‘할아버지들’의 말에 취재진 중 한 사람이 “남의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저렇게 싸워주기가 쉬운 일 아닙니다. 우리 큰절이라도 합시다”라고 즉석 제안했다. 신을 향해서만 엎드리는 그들이 우리식 ‘절’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차치하고 일제히 큰절을 했다.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지만 진심을 느낀 이들은 “뉴스로 접했는데 남한과 북한이 지금처럼 좋은 때가 없는 것 같다” “독일처럼 남북한이 합쳐 큰 나라가 되기 바란다”고 기원했다. 최고령인 후세인이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하지만 또 한국에서 전쟁이 난다면, 이 늙은이라도 필요하다고 한다면 지금이라도 망설임 없이 또 가겠다”고 진지하게 말하자 많은 이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도와준 나라에서 온 우리에게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은 ‘은혜를 갚아라’가 아니라 ‘꼭 잘 살아야 한다’는 축복과 기원이었다.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을 기억하는 날, 현충일이 지났다. 고마운 이들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혹은 겨우 일 년에 하루만 그 고마움을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기를 청한다. 누군가의 희생 위에 쓰인 오늘의 역사이니 말이다.
ccsi@sedaily.com

조상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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