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3일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막판 선거운동이 절정에 오른 주말이다. 정치 싸움인 면도 없지 않으나 그 결과가 민생과 직결되는 것 또한 선거인지라 출마자뿐 아니라 유권자들의 관심도 뜨겁다. 지방선거 투표일을 앞두고 ‘진단타려도’를 꺼내 본다.
아침이슬이 닦고 지나간 듯 청명한 풍경이다. 말간 그림의 첫인상과 달리 주인공 격인 나귀 등짝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는 노인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땅바닥으로 꼬꾸라지기 직전인 연초록 도포차림의 선비가 마치 넓적한 나뭇잎 같다. 버둥거리며 휘젓는 두 다리와 옆에 점잖게 선 잘생긴 나무줄기의 꼬인 모양새가 꽈배기처럼 닮았다. 모시는 주인 영감이 나귀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몸종 아이가 짊어졌던 서책을 내팽개친 채 부리나케 달려간다. 용은 썼으나 떨어지는 그를 붙들기엔 이미 늦었다. 길 가던 나그네가 축 처진 나른한 눈으로 이들을 바라보며 빙글빙글 웃을 따름이다. 그런데 웬걸. 낙상하게 생긴 양반이 웃고 있다. 미끄러진 선비가 실성했나, 그리던 화가가 실수했나. 그림 속 수수께끼는 위쪽에 적힌 한시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희이선생 무슨 일로 갑자기 안장에서 떨어졌나/ 취함도 아니요 졸음도 아니니 따로 기쁨이 있었다네/ 협마영(夾馬營)에 상서로움 드러나 참된 임금 나왔으니/ 이제부터 온 천하에 근심 걱정 없으리라.”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오주석 지음, 솔출판사 펴냄) 중에서
흰 나귀를 타고 가다 떨어지는 이는 중국 당나라 말기에 태어나 오대십국의 혼란기를 거쳐 송나라 초까지 살았던 진단(872~989)이라는 인물이다. 난세에 혀 차며 벼슬길을 등진 채 수상학과 관상학을 연구했으며 복식호흡과 단식으로 신선술을 연마해 118세까지 살았다고 전하는 도인이다. 정사(正史)에 기록된 실존인물이지만 약간의 신화적 과장이 가미됐다. ‘희이선생’의 ‘희이’는 마침내 그를 정계로 끌어낸 송 태종이 내려준 호다. 노자 ‘도덕경’에서 듣고자 해도 들리지 않는 ‘희(希)’와 보고자 해도 보이지 않는 ‘이(夷)’의 경지를 설명한 구절에서 따온 이름이니 ‘심오한 도리를 깨친 사람’이라는 뜻이다. 10년이 멀다 하고 왕조가 바뀌고 크고 작은 나라들이 생겼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하는 와중에, 정치인들은 세상 이치를 잘 읽는 진단에게 끝없이 ‘러브콜’을 보냈다. 이를 피해 다니던 진단은 정중한 고사의 뜻에서 짧게는 수십 일, 길게는 백 일 이상 잠을 잤다고 한다. 그래서 진단의 고사를 그린 동아시아의 그림으로 잠자는 장면의 ‘오수도(午睡圖)’가 많다. 겨울잠 자듯 몇 달씩, 앉아서도 잤다고 하는 ‘잠 전문가’가 말 등에서 졸았다 한들 저렇게 떨어질 리 만무하다. 그럼 왜 떨어졌느냐. 사연인즉 일찍이 그가 황제 재목이라 예언한 조광윤(927~976)이 송나라를 세우고 태조가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빙긋이 웃으며 선 나그네가 소식을 전한 모양이다. 기뻐하며 박장대소하던 진단이 그만 나귀 안장에서 미끄러지는 찰나인데, 그 다급함 속에서도 “천하는 이제 안정되리라(天下自此定矣)”고 외쳤다고 한다. 이것이 ‘진단 타려(墮驢)’의 고사이며 ‘진단타려도’를 우리말로 풀어쓴 제목은 ‘나귀에서 떨어지는 진단선생’이다.
그런데 낙상 목전에서도 웃고 있는 주인공의 얼굴이 어쩐지 낯익다. 살집 좋은 얼굴에 좌우로 날리는 구레나룻과 길게 늘어진 턱수염, 웃으면서도 치켜 올라간 눈매와 큼직한 코가 영락없는 윤두서(1668~1715)다. 국보 제 240호 ‘자화상’으로 강렬한 인상을 준 그 공재 윤두서가 이 그림의 작가로 전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 진단의 고사를 찾아낸 미술사학자 오주석은 “나무둥치 오른편에 숨기듯이 찍혀진 ‘공재(恭齋)’는 바로 윤두서의 호”라고 설명했다.
고산 윤선도의 증손인 윤두서는 박학다식한 문인이자 조선 후기 회화를 선도한 화가다. 왜란과 호란을 겪고 피폐해진 조선의 화단은 1700년대부터 진경산수화와 풍속화, 문인화의 새 시대를 맞았다. 윤두서는 호박·가지 같은 보잘 것 없는 물건과 소외된 하층민의 일상을 그림으로 담기 시작하는 등 ‘참모습’을 찾아 새로운 흐름을 이끌었다. 그러나 윤두서가 살았던 시절 또한 진단의 시대 못지않은 난세였다. 당파싸움이 절정이던 숙종 대였다. 윤두서의 증조부 윤선도는 남인 중에서도 가장 극렬하게 노론과 대립한 인물이다. 남인의 지지를 받은 장희빈이 중전 자리에서 밀려나고 인현왕후의 복권과 함께 노론이 득세하자 윤두서는 능력을 펴기는커녕 모함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 그래서 46세에 고향 해남으로 낙향했고 이 그림은 48세에 세상을 등지던 그 해, 1715년에 그린 그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림 위에 한시를 쓴 이는 화가 자신이 아니라 숙종 임금이다. 왕이 친히 내린 어제(御製)를 뜻하는 도장이 찍혀있다. 조선 역대 임금들의 시를 모은 문집 ‘열성어제’ 12권에도 같은 시가 수록돼 있어 국왕이 감상한 궁중 보물임이 확인됐다. 그렇다면 윤두서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고, 뜻을 펴지 못한 채 낙향하는 그를 잡지도 못한 숙종은 어찌 이 그림을 칭송한 것일까?
우선 윤두서가 어지러운 세상을 정리하고 태평천하를 열어줄 군주의 시대를 기원하며 진단 선생에게 자신을 빗대 표현한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관직을 마다하고 숨어 살면서도 항상 세상을 걱정했고 말에서 떨어져 다칠 것을 알면서도 어진 군주의 탄생을 더 기뻐하는 진단이 윤두서 자신과 다를 바 없다는 항변이기도 했을 것이다.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렸으니/ 오는 이 가는 이 흙이라 하는구나/ 두어라 알 이 있을지니 흙인 듯이 있거라.”
한양을 떠나며 이 같은 시를 남긴 윤두서에게 왕에 대한 원망이 없었을 리 없다. 그렇다면 이 그림을 보며 감탄하던 숙종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스스로 송 태조 조광윤이 된 것처럼 흐뭇해했을까?
여러 전후 사정과 그림에 한껏 두드러지는 기교 때문에 학계 일각에서는 이 그림을 윤두서가 그린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법 강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를테면 언덕에 소복하게 자란 풀의 모양새가 너무 통통하고 예쁘장한 것이 전문 화원의 솜씨 같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공재는 “임금이 곤란해할지라도 옳은 일이라면 행할 수 있도록 질책한다”는 ‘맹자’의 구절에서 그 호를 따 온 인물이다. 군주 앞에서 방긋 웃어가며 비위 맞췄을 사람이 아니라는 분석 또한 새겨들을 법하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림의 품격은 더없이 높다. 특히 진단 선생을 태운 나귀는 흰 토끼처럼 새하얀 것이 영물스럽다. 새털 같은 갈기와 충심을 품은 눈동자, 분홍빛 귀 속살까지 흠잡을 데 없다. 사실 윤두서는 인물화, 산수화보다도 말 그림에서 으뜸이었다. 옛 중국 주나라 때 목왕은 아끼는 8마리 말을 그린 ‘팔준도’를 통해 평화가 안착한 시기를 그렸고 조선 초 최고의 화가 ‘몽유도원도’의 안견도 이성계의 개국을 찬양하며 ‘팔준도’를 그렸듯 그림 속 말은 덕망있는 제왕과 권위를 상징한다. 조선의 문인화라 하면 흔히 ‘사군자’를 떠올리지만 윤두서는 고결하고도 기품있는 말 그림을 문인화의 경지로 끌어올린 전무후무한 화가다. 그의 말 그림은 해남 윤씨 가문을 통해 여러 점 전하며 국립중앙박물관이 윤두서의 전칭작으로 소장한 ‘팔준도’도 높은 기량을 보여준다.
나귀에서 떨어진 진단 선생이 크게 다치진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길이 꺾여 오른쪽 울창한 숲으로 향한다. 밝은 미래로 향하는 역사적 전환점을 암시하는 듯하다. 새로운 지도자의 선출이 넘어져도 웃을 정도로 기쁜 소식이길, 그리하여 태평성대가 열리기를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