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일상을 점령한 유튜브·안드로이드·인스타그램의 공통점은 뭘까. 바로 실리콘밸리의 작은 스타트업으로 출발해 인수·합병(M&A)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페이스북의 설립자 마크 저커버그는 2012년에 직원 수가 13명에 불과했던 스타트업 ‘인스타그램’을 무려 10억 달러에 인수했다. 페이스북이 사들였던 회사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고 이 같은 행보를 놓고 대다수 사람들은 그 만한 가치가 있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저커버그의 판단은 옳았다. 인스타그램은 급속히 성장하며 지난해 말 기업 가치가 500억 달러(포브스 추산)에 달했다. 인수 전과 비교하면 10배나 커진 것이다. 월간 이용자는 3,000만명에서 8억명으로 수직 상승했으며 현재 확보한 광고주만 200만 곳이 넘는다.
구글은 2005년 모바일 운영체제(OS) 개발 업체인 안드로이드를 5,000만 달러(560억원)에 인수했다. 당초 안드로이드를 개발한 앤디루빈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인수 제의를 했지만 거절 당했고, 스마트폰 시장의 성장을 확신한 구글의 품에 안겼다. 구글은 이듬해 검색 및 소셜 미디어 시장이 동영상 중심으로 재편될 것으로 보고 유튜브를 17억 달러(1조9,000억원)에 사들였다. 현재 안드로이드 인구는 20억 명으로 스마트폰 운영체제의 80% 이상을 장악했으며 유튜브의 기업 가치는 900억 달러에 달한다.
좋은 기후와 훌륭한 인재, 풍부한 자금 등 실리콘밸리를 설명하는 단어는 많지만, 창업과 혁신의 메카로 만든 비결은 거침없이 피를 섞는 M&A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성장한 대기업은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거나 우수 인력을 확보할 때 M&A를 적극 활용한다. 능력 있는 창업가들이 혁신적인 사업 모델을 만들면 대기업은 M&A를 통해 새로운 성장 엔진을 장착하는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휴렛패커드·오라클·애플 등 전통을 자랑하는 글로벌 기업은 물론 2000년대 들어 세계 시장을 평정한 구글·페이스북·아마존 등은 기술을 사고 인재를 영입하는 데 과감하다.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로 불리는 휴렛패커드가 1989년 이래 지금까지 인수한 회사는 100개를 넘고 인수 총액도 80조원에 이른다. 시스코는 약 70조원 어치의 M&A를 했는데 90% 이상이 실리콘밸리에 자리한 미국 업체였다.
사업 아이디어와 기술만 좋으면 언제든지 높은 가격에 팔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니 자연스럽게 창업가나 투자가는 새로운 비즈니스에 뛰어든다. ‘투자→성장→회수→재투자’로 이어지는 실리콘밸리의 창업 생태계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국내 산업의 고질병으로 자리 잡은 기술 탈취는 실리콘밸리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안건준 벤처기업협회 회장은 “실리콘밸리에서는 대기업이 벤처 회사를 제 값 주고 인수하고, 확보한 우수한 제품과 인재를 활용해 인수 가격을 합리화할 수 있을 만큼 돈을 잘 벌면 된다는 문화가 잘 정착돼 있다”며 “그렇게 번 돈으로 또 좋은 회사를 인수하는 것이 바로 ‘실리콘밸리 생태계’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미국은 물론 유럽이나 일본에서는 기술 도용이라는 단어는 있어도 기술 탈취라는 용어 자체가 없을 정도다.
반면 한국은 대기업이 스타트업을 제 값 주고 거래하는 M&A 시장이 전무한 실정이다. 벤처기업협회에 따르면 벤처투자 회수 시장에서 M&A가 차지하는 비중은 미국이 94%(2016년 기준)에 달하지만 한국은 11%에 불과하다. 실리콘밸리의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처럼 회사 가치를 인정받아 매각된 경우는 거의 없는 셈이다. 그나마 국내에서 기업공개(IPO)가 창업가나 투자가가 엑시트(Exit)할 수 있는 수단으로 꼽히지만 회수 기간이 길다는 게 단점이다. 국내 벤처기업이 IPO를 통해 투자금을 회수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평균 12년. 통상 6~7년인 미국보다 2배 길고 유럽 등 다른 선진국보다는 3배 이상 더 걸린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벤처 강국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선 실리콘밸리와 같은 M&A 생태계가 뿌리 내려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대기업들이 기술력 있는 스타트업을 적극 발굴하고 M&A하는 문화가 선행돼야 한다. 스타트업 인수를 비용이 아닌 미래 성장을 위한 투자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얘기다. 국내 대표 인공지능(AI) 기업 솔트룩스의 이경일 대표는 “대기업들이 M&A를 비용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인수 대상인 스타트업은 원가를 낮춰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하기 때문에 해당 기업의 잠재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며 “이제 우리 기업들도 M&A를 납품 단가를 깍듯이 바라보는 ‘하드 리더십’에서 벗어나 실리콘밸리의 대기업들처럼 스타트업의 미래 가치를 보고 대가를 지불하는 ‘소프트 리더십’을 갖출 때”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