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용 감독의 ‘트릭 축구’는 끝내 통하지 않았다.
8년 만의 월드컵 16강 진출에 도전하는 한국축구의 앞길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웠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57위의 한국은 18일(이하 한국시간) 러시아 니즈니노브고로드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러시아월드컵 F조 조별리그 1차전에서 유럽의 강호 스웨덴(24위)에 0대1로 졌다. 윌리엄힐 등 외국 베팅 업체들이 가장 확률이 높다고 예상한 스코어가 불행하게도 그대로 적중한 것이다. 공수 핵심인 권창훈(디종)·김민재(전북)의 부상 낙마와 국민의 무관심 등 악재를 첫판에 극복하겠다는 계획은 이렇게 어그러지고 말았다.
‘통쾌한 반란’을 약속한 신 감독은 일찌감치 스웨덴전 ‘올인’을 선언했다. 객관적 전력상 F조 상대국 3팀 중 가장 해볼 만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면서 2010남아공 대회 이후 8년 만의 16강 시나리오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독일을 상대로 이변의 1승을 챙긴 멕시코(24일 0시)에다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독일(27일 오후11시)을 차례로 상대해야 하는 힘겨운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자칫 4년 전 브라질 대회의 악몽을 다시 겪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2014브라질 대회에서 홍명보 감독(현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이 이끌었던 대표팀은 러시아와 1대1 무, 알제리에 2대4 패, 벨기에에 0대1 패의 1무2패 성적으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손흥민(토트넘)은 통한의 눈물을 쏟았고 귀국장에는 분노의 ‘엿’이 날아들었다. 일부 비뚤어진 팬의 행동이었지만 기대가 컸기에 그만큼 국민의 실망도 컸다.
조커가 익숙한 김신욱(전북)을 최근 평가전에 선발로 내보내며 “트릭(속임수)일 수 있다”고 흘리는 등 정보전에 각별하게 신경 써온 신 감독은 이날 4-3-3 포메이션을 꺼내 들었다. 4-4-2나 3-5-2를 쓸 것이라는 예상을 깬 것이다. 트릭 발언으로 더 유명해진 김신욱이 최전방에, 손흥민·황희찬(잘츠부르크)이 좌우에 섰다. 공격진에 선발 총동원령을 내린 것이다. ‘캡틴’ 기성용(스완지시티)과 이재성(전북)·구자철(아우크스부르크)이 중원을 지키는 형태에 수비는 예상대로 왼쪽부터 박주호(울산)-김영권(광저우)-장현수(FC도쿄)-이용(전북)이 나왔다. 골키퍼 장갑은 그간 주전으로 꼽혀온 김승규(빗셀 고베) 대신 조현우(대구)가 꼈다. 스웨덴은 전망대로 4-4-2 전술로 ‘야전사령관’ 에밀 포르스베리(라이프치히)를 왼쪽 날개에 기용했다. 투톱은 마르쿠스 베리(알 아인)과 올라 토이보넨(툴루즈).
한국은 지난해 11월 평가전에서 4-4-2 전술로 최상의 경기력을 보여줬다. 하메스 로드리게스(바이에른 뮌헨)가 버틴 강호 콜롬비아를 2대1로 눌렀다. 신 감독은 그러나 이후 가장 잘하는 것을 더 강하게 다듬기보다 ‘실험’에 몰두했다. 불확실한 여러 선택지를 만드는 동안 계속 선수가 바뀌었다. 다양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전방위 준비였다고 볼 수 있지만 전통적 강팀에 비해 선수층이 얇은 우리 수준에는 무리라는 의견도 많았다. 아직 반전의 기회는 남아 있어 실험의 결과는 평가하기 이르다. 그러나 일단 첫 번째 고비에서는 한계를 실감한 셈이다.
뼈아픈 실점은 후반 20분에 나왔다. 주장 안드레아스 그란크비스트에게 페널티킥을 내준 것. 결정적인 실점 기회를 3~4차례 ‘슈퍼세이브’로 막아낸 조현우였지만 페널티킥까지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월드컵 사상 처음 도입된 비디오판독(VAR) 끝에 허용한 페널티킥이라 더 안타까웠다. 후반 17분 김민우(상주)가 빅토르 클라손에게 건 태클에 주심은 처음에는 파울을 선언하지 않다가 이내 판독실에 확인을 요청했고 판정이 번복됐다. 김민우는 전반 26분께 박주호(울산)의 부상으로 갑작스럽게 투입된 선수였다. 박주호는 중앙에서 측면으로 연결된 정확도 떨어지는 패스를 잡으려다 허벅지 근육을 다쳤다. 대표팀으로서는 패스 미스에 불운이 겹친 셈이었다. 에이스 손흥민은 스피드를 이용한 빠른 측면 돌파로 빅리그 정상급 공격수다운 모습을 보였으나 다소 고립되는 장면이 많았다. 한국은 후반 중반 스무 살인 막내 이승우(엘라스 베로나)를 투입해 분위기 반전을 꾀했지만 스웨덴 골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잦은 패스 미스와 정확도가 떨어지는 크로스 탓에 결정적인 장면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후반 추가시간 오픈 찬스에서 황희찬의 헤딩 슈팅은 골대를 살짝 빗나갔다. 설상가상으로 황희찬과 김신욱이 옐로카드를 받아 다음 경기에서 운신의 폭도 좁아지게 됐다.
2002년부터 이어진 첫판 무패의 기분 좋은 징크스도 끊겼다. 한국은 최근 네 차례 월드컵의 조별리그 1차전에서 3승1무를 거뒀으나 첫판 무패 행진은 러시아에서 허무하게 멈춰 섰다.
1958년 자국 월드컵 준우승, 1994미국월드컵 3위를 자랑하는 스웨덴은 12년 만에 다시 밟은 본선에서 첫 경기를 따내며 16강 희망을 밝혔다. 유럽예선에서 전통 강호 네덜란드·이탈리아를 넘고 올라온 스웨덴은 체격의 우위를 활용한 선 굵은 공격과 터프한 몸싸움으로 한국의 반란을 잠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