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 칼리닌그라드

‘순수이성비판’으로 유명한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에게는 특이한 이력이 있다. 칸트는 평생 단 한 번도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다.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난 칸트는 이곳에서 대학을 졸업했을 뿐 아니라 시간강사와 교수 자리도 같은 곳에서 얻었다. 심지어 한 연구에 따르면 그가 평생 반경 16㎞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칸트를 뼛속까지 독일인이라고 하는 이유다. 하지만 칸트가 220년 후에 다시 태어났다면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독일의 쾨니히스베르크가 사라지고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만 남았으니 말이다.

발트해 남부에 있는 칼리닌그라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로 병합된 곳이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둘러싸인 외딴 섬 같은 존재지만 중요성은 어느 곳보다 크다. 이곳이 없으면 러시아는 발트해로 진출할 수 있는 통로도 발틱 함대의 모항도 잃게 된다. 러시아가 칼리닌그라드를 지키기 위해 폴란드 등과 끊임없이 갈등을 벌이는 이유다.




하지만 이 땅은 원래 러시아 영토가 아니었다. 1254년 독일 십자군 튜턴기사단이 프로이센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이 지역을 일군 이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소련으로 병합되기 전까지 700년간 독일이 지배하던 곳이었다. 원래 이름이었던 쾨니히스베르크 역시 보헤미아의 왕이었던 오토 카르 2세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것이었다. 뱃길을 이용한 무역이 발달해 1935년에는 인구가 37만명에 달하는 지역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부동항이라는 이점이 반드시 축복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얼지 않는 뱃길을 원하는 러시아와의 충돌이 잦았다. 1758년에는 러시아의 침공으로 4년간 도시가 점령당했고 1차 세계대전 때도 소련과 독일이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영국과 소련군의 맹폭으로 유명한 성당 등 문화재들이 큰 피해를 봤다. 이곳에 집단으로 거주했던 유대인도 나치의 탄압 때문에 10분의1 이하로 줄었다.

관련기사



칼리닌그라드가 다시 갈등의 중심에 설 조짐이 보인다. 러시아가 최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대치하고 있는 이 지역에 핵무기 저장시설을 대폭 보강한 위성사진이 공개된 탓이다. 비록 핵무기를 배치한 것은 아니지만 서방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하다. 세계인의 축제인 월드컵 예선전이 열리는 곳에 갈등의 그림자가 드리우니 전쟁과 평화는 종잇장 한 장 차이라는 게 ‘헛말’은 아닌 듯싶다. /송영규 논설위원

송영규 논설위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