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戰亂)이 한창인 1100년대 초 일본 헤이안 시대. 녹음이 우거진 숲속 ‘라쇼몽(羅生門)’을 사무라이와 그의 아내가 지나간다.
그늘에서 낮잠을 자던 산적이 사무라이의 아내를 겁탈한다. 나무꾼이 사무라이의 가슴에 단도가 꽂혀 죽은 것을 발견하고 관청에 신고한다. 산적은 체포되고 행방이 묘연했던 사무라이의 아내도 관청에 불려와 심문을 받는다.
여기서 진실공방이 벌어진다. 산적은 여자를 겁탈한 것은 맞지만 사무라이와의 결투를 통해 그를 죽인 것이라며 정당성을 항변한다. 사무라이의 아내는 겁탈당한 자신을 보는 남편의 눈초리가 무서워 혼란 속에서 남편을 죽였다고 진술한다. 무당의 힘을 빌려 강신한 사무라이는 아내가 자신을 배신했고 그는 자결했다고 주장했다. 단편소설의 귀재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쓴 ‘라쇼몽(1915년)’의 줄거리다. 하나의 똑같은 사건을 놓고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에 맞게 해석하는 인간 심리를 묘사했다. 일종의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다.
6·13지방선거에서 참패한 자유한국당에 라쇼몽 행태가 벌어지고 있다. 눈꼴사납다. 당의 몰락에 1차 책임을 지고 있는 친박(친박근혜계) 세력들은 후안무치다. 혁신안이 나오자마자 반발한다. 보수를 응원하는 국민들에게 사죄하면서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낯 두꺼운 소리만 해댄다. 친박 좌장인 서청원 의원이 이제야 탈당했다. 친박을 신상품처럼 팔면서 호가호위했던 친박 의원들은 어디에 숨었나. 당장 커튼 뒤에서 나와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비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패잔병일지라도 비겁함만은 보이지 말아야 한다.
중진 의원들은 친박을 방패 삼아 혁신한다고 떠들어댄다. 중론을 모으지도 않고 설익은 혁신안을 들고 나와 벌집만 쑤셔놓았다. 김성태 원내대표와 최고위원들은 완장 행세하지 말고 조속히 비대위원장을 수혈받아 혁신과 쇄신의 길을 앞당겨야 한다. 친박 책임 타령하지 말고 자중해야 한다. 대표직을 내려놓으면서 모든 책임을 의원들에게 돌리는 홍준표 전 대표는 참으로 비겁하다. 혹여 여기저기 심어놓은 당협위원장을 움직여 전당대회에서 재기를 노리는 꼼수를 부리지 말기 바란다. 자신의 저서 제목처럼 ‘변방’에 머물러 계시라.
한국당이 멸문지화의 위기에 처하는 데 있어 초·재선 의원들은 침묵의 동조자다. 홍준표 체제가 비뚤어진 공천을 하고 정책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막말을 일삼을 때 그들은 숨었다. 오는 2020년 총선에서 혹여 공천을 받지 못할까 노심초사하면서 벙어리를 자처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더 나쁘다. 그들이 과연 구체제에 삿대질하고 혁신을 외칠 자격이 있는가. 자신이 속한 정당이 패망의 길로 가고 있는데 ‘나는 책임이 없다’며 애써 외면하는 한국당 정치꾼들에게서 라쇼몽의 재현을 본다.
100년을 앞선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정치인이 갖춰야 할 세 가지 자질로 열정(자기 희생), 책임감, 균형감각을 꼽았다.
한국당 의원들은 자기 희생은커녕 책임을 동료에게 돌렸고 균형 잡힌 정책 대안도 내놓지 못했다. 소명으로서의 정치인이 아니라 생활인으로서의 정치꾼으로 전락했다. 자기 희생과 책임감은 보수 정신의 핵심이다. 한국당 정치꾼들은 값싼 입으로 보수를 얘기하면서 보수 정신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처절한 반성과 대오각성, 그리고 혁신을 실천한 후에야 보수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꺼내야 한다.
19세기 영국 철학자였던 존 스튜어트 밀은 보수주의자들을 ‘바보들의 무리’라고 조롱했다. 지금의 한국당 모습이 아닐까.
한국당 정치꾼들은 쏟아지는 비판과 비난에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있다. 그래도 보수 정치철학의 태두인 에드먼드 버크의 촌철살인만은 기억하자. 그는 “조금이라도 권력을 가진 사람은 신뢰할 만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하고 두렵도록 통감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나물에 그 밥’ 정치꾼 집합소인 한국당이 국민을 보고 정치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사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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