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를 떠나셨어도 나라의 앞날을 늘 걱정하시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비보를 접했습니다. 황망하고 허전합니다. 어떤 수사(修辭)가 총리님의 행장(行狀)을 담아낼 수 있을까요. 세상은 총리님의 부음을 접하고 ‘3김 정치 시대의 종언’이라고 평을 합니다만 국내외 정세가 순탄하지 않은 요즘 총리님의 경륜 어린 조언은 더욱 그리울 겁니다.
역사의 물줄기를 돌린 5·16쿠데타와 1990년 3당 합당, DJP연합 등 숨 가빴던 당신의 정치 역정은 현대 정치사의 변곡점이었습니다. 당신이 계시는 동안 나라는 부강해졌습니다. 당신이 밑돌을 놓은 자주국방과 경제자립의 큰 그림은 오늘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총리님은 정치 통찰력을 갖춘 정치인이셨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요. 총리님은 당신의 정적인 김대중·김영삼 대통령의 킹메이커 역할을 자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께선 정치발전의 ‘기승전결(起承轉結)’론을 펴셨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만약 DJP연합이 없었다면 수평적 여야 정권교체의 정치역사를 써 내려갈 수 있었을까요.
모든 일은 시리(時利)가 맞아야 한다며 인내하고 참아내는 모습은 당신이 언젠가 쓰신 ‘줄탁동기(알을 깨기 위해 알 속의 새끼와 밖의 어미가 함께 쪼아야 한다는 뜻)’란 휘호에 잘 표현돼 있습니다. 총리님의 정치인생은 다 탄탄대로가 아님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해외 유랑을 하셨고 때론 집에 갇히는 등 굴곡진 시련으로 점철돼 있었습니다.
2년 전 촛불 시위가 서울 광화문을 메울 무렵 지도자의 품격을 걱정하시던 말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둔한 저는 이제야 당신이 좌우명으로 내세운 인생사무사(人生思無邪)의 속 깊은 뜻을 알아차리게 됐습니다. 뭘 생각하더라도 어긋나는 걸 생각하지 말라며 스스로의 다짐을 그리 표현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같은 지역의 정치 후배인 저는 총리님의 녹차 같은 충청사랑의 그윽한 마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일간신문 경제부장으로 있던 저에게 정치입문을 권유했을 때 제가 정중히 사양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럼에도 주요한 모임이나 자리에는 저를 불러 격려해주셨습니다. 또 노무현 정부와 각을 세우면서도 행정수도 이전에는 누구보다 팔을 걷었고 그때 집권당의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특별위원장을 맡은 저에게 힘을 실어주셨습니다. 국립현충원에 영면할 자격을 갖췄음에도 고향 부여로 가신다니 저와 충청인은 물론 국민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요즘 저는 총리님이 말씀하신 ‘정치는 허업(虛業)’이란 뜻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정치는 국민을 위해서 하는 것이지 정치인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란 것을 말이죠. 그래서 정치인은 정치로 얻는 게 없다는 것을 그리 표현하셨지요. 국민을 호랑이로 여겨야 한다며 후배 정치인들을 일깨워 주시던 그 큰 뜻을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총리님은 품격 있는 정치를 지향하셨지요. 대중문화와 예술을 가까이하며 다정다감한 모습을 보이셨던 당신의 정치 풍류는 멋있었습니다. 노병은 죽지 않고 해는 질 때 서산을 붉게 물들인다고 하셨지요. 정치적 풍운아, 풍운의 정치인이신 총리님을 이제 놓아 드리겠습니다. 시름과 걱정, 다 내려놓으시고 영겁의 평안을 누리시옵소서. 박병석 엎드려 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