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여명] 카이로스와 디케

사법행정권 남용싸고 거센 논란

檢수사 초유의 사태로까지 번져

사법치욕 넘어 사회위기에 직면

대법원장 신뢰회복 失機 말아야

김성수 사회부장



김성수 사회부장

왼손에는 천칭(저울), 오른손에는 칼을 들었다. 앞머리는 무성하지만 뒷머리는 민대머리다. 어깨와 발목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기회의 신’ 카이로스의 모습이다.


카이로스는 최근 변호사의 세계를 다룬 TV 드라마의 도입부에 복선으로 등장했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그 기이한 형상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풍성한 앞머리는 사람들이 쉽게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알려주기 위해서고 뒷머리가 대머리인 건 한 번 놓친 기회는 다시 잡을 수 없다는 걸 경고하기 위해서죠. 어깨와 발에 달린 날개는 기회란 순식간에 날아간다는 걸 의미하죠.”

덧붙이자면 저울은 정확한 판단을, 칼은 날카로운 결단을 뜻한다. 기회가 다가왔을 때 해야 하는 행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저울과 칼을 든 모습은 ‘정의의 여신’ 디케와 꼭 닮았다. 율법의 여신 테미스와 제우스의 사이에서 태어난 디케는 정의가 훼손된 곳에 재앙을 내린다고 전해진다. 여신의 저울은 ‘만인은 평등하다’는 공명정대를, 칼은 냉엄한 단죄를 각각 상징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복을 입은 정의의 여신을 대법원에서 마주할 수 있다. 서양의 디케는 대부분 눈을 가리거나 감은 채 서 있지만 대법원 여신상은 대법정 출입구 위에 눈을 똑바로 뜬 채 앉아 있다. 또 왼손에는 칼 대신 법전을 들었다. 눈을 뜬 디케는 실체적 진실을 똑바로 바라보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대법원의 여신은 사법 비리가 불거질 때마다 곤욕을 치른다. 법조계 안팎에서 사회를 외면한 채 고귀한 척 앉아 법전에만 의지하는 법관을 그에게 빗댄다. 주관이나 사사로움을 떨치기 위해서는 눈도 가려야 했다면서. 이를 두고 독설가인 노회찬 정의당 의원은 최근 “(여신이) 니 누꼬, 느그 아버지 뭐 하노? 청와대는 머라 카드노?”라고 말하는 상황으로 풀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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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행정권 남용을 둘러싼 논란이 거세지면서 대법원 여신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특히 이번은 잊을 만하면 드러나는 사법 비리나 사법 파동과 차원이 다르다.

전임 대법원장과 대법관이 법원행정처 내부 문제로 수사를 받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해 있다. 해외로 눈을 돌려봐도 대법원이 검찰의 칼끝에 놓인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사법부 최고 기관이 압수수색을 당하고 대법관이 검찰에 소환되면 우리나라는 사법 치욕을 넘어 사회 위기로 치달을 수 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법조계 여론의 화살은 김명수 대법원장을 향했다. 사법 위기를 사회 위기로 몰고 가고 있다는 비난의 화살이다.

지난달 31일 발표된 대법원장 담화문은 일찌감치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사법행정권 남용이 자행된 시기에 한 명의 법관으로서 참회하고 사법부를 대표하여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라는 표현에서 ‘자행’이라는 단어를 문제 삼았다. 사법부의 수장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나선 셈이라 일부 판사들은 반감을 드러냈다.

대법원장의 책임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사법부가 청와대 눈치를 보면서 문건을 작성한 행위는 부적절한 처신이지만 형사 처벌 대상은 아니라는 특별조사단의 결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재판을 두고 흥정했다는 ‘재판 거래’로 의혹을 키우는 데 기여(?)했다.

시차를 두고 이어진 “고발도 검토할 수 있다”와 “수사에 협조하겠다”는 발언은 법원 안팎에서 지탄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법원이 소장파와 고참 법관으로 양분되는 묘한 상황이 연출됐다. 심지어 대법관 13명 전원이 공개적으로 대법원장과 다른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신임 대법원장의 적폐 청산에 기대를 걸었던 중도 성향의 판사들도 하나둘 등을 돌렸다. 대법원장이 사법 신뢰와 법관의 자긍심을 끌어내렸다는 이유에서다. 이제는 결자해지해야 할 때다.

디케와 닮은 형상을 한 카이로스는 한 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붙잡을 수 없는 냉정한 현실을 반영한다. 김 대법원장은 이제라도 사법 신뢰의 추락을 막을 수 있는 기회를 잡아야 한다. 좌고우면하면서 카이로스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sskim@sedaily.com

김성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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