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IT

[세종600년, 과학기술 DNA를 깨워라] 특허 많지만 산업화는 빈약...'實事求是 R&D' 시대 열어야

<하> 4차산업혁명·삶의 질 제고를 위한 국가 R&D

'무늬만 연구소' 등 고비용 저효율구조 수십년째 그대로

천체물리·수학·인쇄술로 백성들 삶의 질 끌어올린 세종처럼

미세먼지·바이오·의료 등 '실용적 연구'에 국가지원 늘려야




세종대왕(1418~1450년 재임) 시절 산학(算學·수학) 천재인 천체물리학자 이순지. 1427년 문과에 급제한 뒤 월식을 보고 ‘지구는 둥글고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한다. 이는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 숨진 직후 책을 통해 지동설을 펴며 파문을 불러일으킨 것보다 100년 이상 앞선 것이다. 1430년 한양의 위도가 38도인 것까지 맞히며 세종의 눈에 띈 이순지는 서운관에 근무하면서 중국·아라비아 역법을 철저히 연구한다. 금속활자에도 일가견이 있어 1434년에는 갑인자(세계 최초 금속활자는 1230년 ‘상정고금예문’, 현존하는 것은 1377년 ‘직지’) 개발도 주도했다. 1444년에는 김담 등과 함께 칠정산(七政算, 해·달과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 운행 측정) 외편을 내놓고 지구 공전 시간을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하기에 이른다. 현재 과학으로 계산한 시간보다 단 1초밖에 빠르지 않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천문역법의 발달은 24절기와 시간, 일식·월식 등을 정확히 예측하는 토대가 돼 정초 등이 편찬한 ‘농사직설’과 함께 ‘농자천하지대본’ 사회에서 농업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키는 데 원동력이 됐다. 천명을 받은 왕의 통치기반 강화로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이순지의 업적은 중세유럽(1633년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에서 ‘지동설 포기’를 맹세하고 풀려남)의 마녀사냥과 달리 세종의 혁신 리더십 하에서 ‘이치를 한번 따져보자’는 합리적인 분위기라 가능했다. 세종이 신임하던 정인지를 서운관 책임자로 임명해 이순지를 뒷받침해준 것도 주효했다.

세종이 문맹이었던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3년 뒤 반포)한 1443년에 과학기술의 기초인 수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도 눈에 띈다. “토지를 측량할 때 이순지와 김담 등이 아니었다면 어찌 쉽게 할 수 있었겠는가. 국가의 긴요한 사무인 산학을 익히게 할 방책을 논의하라”며 승정원에 지시한 것이다.


아버지를 닮아 탁월한 과학기술인이었던 문종의 치세가 단 2년 만에 끝나며 우리 과학기술 문명은 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을 거쳐 중종 때 완연한 침체기에 접어들고 20세기 초 망국의 한으로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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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이제는 세종의 혁신 리더십을 바탕으로 과학기술 르네상스를 열어 국민의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부출연연구원과 대학·기업에 지원하는 연 20조원 규모의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을 통해 과실을 많이 거둬들여야 한다는 얘기다. 지금 출연연과 학계는 특허는 많지만 산업화 비율이 턱없이 낮은 고비용·저효율 구조다. ‘무늬만 연구소’를 차려놓고 자금 지원만 받는 중소기업도 적지 않다. 혁신 성장동력 확충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미세먼지 측정·분석예보·저감과 폐플라스틱·라돈 등 환경문제, 교통량에 따른 탄력적인 교통체계, 범죄·지진에 대비한 사회안전망, 암·치매·감염병 등 바이오·의료혁명이라는 삶의 질을 높이는 측면에서도 성과가 미흡하다. 이용자 등 수요처의 의견을 반영해 시너지를 높이는 리빙랩도 걸음마 단계다. 지난달 29일 대통령 직속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가 내년에 ‘연구자중심 기초연구에 1조6,800억원(17.6% 증액), 혁신성장 선도에 8,500억원(27.2%), 4차 산업혁명 대응에 1조7,000억원(13.4%), 재난·안전 연구에 1조500억원(16.7%)’을 투입하기로 한 것은 바람직하지만 현장에서 피부로 느끼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정병선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연구개발정책실장은 “연구자를 신뢰하고 맡기며 소통한 세종의 리더십은 문재인 정부의 가치와 원칙·방향과 맞는다”며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과학기술인이 자부심을 느끼고 충분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힘줘 말했다.

문제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여전히 정부가 과제를 정해 내려주는 ‘톱다운’식 예산 배분, 연구현장의 ‘예산을 따내고 보자’는 구습과 권위주의 문화 등으로 창의성 발현과 융복합연구에 제약이 따른다는 점이다. 각 부처와 기관별로 연구개발관리조직도 흩어져 있는데 기상청의 경우 R&D의 11%를 국립기상과학원에 집행하고 나머지는 아웃소싱해 초점이 분산되고 중복연구가 불가피하다. 연구과제중심제도(PBS)도 기초연구를 중심으로 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요구된다. 연구현장에서는 “도전적인 연구를 지원하고 중장기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며 석박사·포닥 연구원의 권익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쏟아진다.

이공래 대구경북과학기술원 교수는 “연구원들의 창업과 기술 이전에 많은 노력이 필요한데 정부나 연구현장 모두 관심이 부족하다”며 “연구현장에서 과제만 따오는 데 집중하게 만드는 시스템과 수직적 문화 풍토를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인석 한국바이오경제학회장(외대 경제학과 교수)은 “선진국 대학은 교육·연구는 물론 상업화 미션 수행에도 역점을 둔다”며 “우리도 학문세계에만 머무르지 않고 지식과 기술로 산업을 만드는 기업가대학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찬모 평양과학기술대 명예총장은 “미국과 소련은 냉전기에도 우주정거장 등을 공동개발했다”며 “남한의 인공위성과 북한 발사체 기술을 융합하고 남한의 하드웨어, 상품화 능력과 북한의 소프트웨어 파워를 접목하면 4차 산업혁명에서 유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고광본선임기자 kbgo@sedaily.com

고광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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