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나는 열매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과일이 배인지 덜 익은 사과나 복숭아인지는 모르겠으나 몇날 며칠을 두고만 보다 결국 못 참고 서리하게 되면 어쩌나 싶다. 이름 모를 과일의 맛이 궁금한 게 아니라 그 빛깔이 고와서다. 붉지도 푸르지도 노랗지도 않은 열매의 색이 마치 손대서는 안될 하늘의 것은 아닌지 신비롭다. 초록과 파랑을 동시에 지닌, 그래서 숲에서 나왔나 하늘에서 내렸나 싶은 나무 이파리가 달린 열매의 신비감을 더욱 부추긴다. 곁에 앉은 갈가마귀(鴉)가 달 옆에 기댄 듯, 올려다보는 새가 해를 바라보는 듯 탐스럽다.
오원 장승업(1843~1897)에게 못 그릴 그림은 없었다. 산수, 인물화뿐만 아니라 꽃·새·짐승을 그린 화조영모화, 정물화 격인 기명절지도 등 여러 소재에 두루 능했다. 그중에서도 전하는 작품 수가 많고 특히 뛰어났던 분야가 ‘화조영모’였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한아탐과(寒鴉貪果)’는 갈가마귀가 열매를 탐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과일 찾아 날아든 두 마리 산새를 그린 이 작품은 먹잇감 찾는 매 한 마리를 그린 ‘호응탐시(豪鷹眈視)’와 짝을 이룬다. 각각의 그림이 독립적으로 완결성을 갖지만 둘을 함께 둘 때 더 조화로운 구성을 이루는 대련(對聯) 형식의 쌍폭이다. 오원이 즐겨 그린 새가 기러기와 학·오리·닭·까치·앵무·구관조·참새 등 다양했지만 그중 단연 돋보인 게 매와 독수리 같은 맹금류였다. 야무지게 휜 매의 부리가 무기처럼 단단해 보인다. 노란 눈동자를 굴려 다른 데를 보는 척하지만 정확히 왼편 화폭의 산새를 노리고 있다. 살짝 벌린 녹색 부리 안쪽으로 낼름거리는 붉은 혓바닥과 눈 깜짝할 새 낚아챌 준비를 하고 몸통 안쪽으로 바짝 끌어올려 숨긴 한쪽 발에서 그 속셈이 읽힌다. 길이 120㎝가 넘는 두 폭을 나란히 두니 매와 산새들이 삼각형의 꼭지점이 돼 완벽한 구도를 이룬다. 화가는 그림 안에서 조경의 신(神)이 됐다. 꽃꽂이해놓은 듯 뻗은 가지와 색색의 꽃이 화사한 정취를 드리운다. 새를 그리며 묘사에 충실했다면 나무를 그릴 때는 흥에 취했다. 찍었다 밀고 잡아당겼다 꽂으며 휘두른 붓질이 먹을 놀려 꿈틀대는 가지를 그렸다. 테두리 없이 그린 몰골이 변화무쌍하고 옅게 칠한 담채가 부드럽고 산뜻하다. 화사한 정취와 팽팽한 긴장감이 조화를 이룬다. 서울대박물관 학예연구관을 지난 미술사학자 진준현은 “장승업의 화조영모화는 소재상으로나 화법상으로나 조선시대 전통회화의 총결산”이라며 “소재와 화법이 전통적이든 외래의 것이든 자신의 예술적 영감 속에 녹였고 아름다운 채색, 생동하는 필묘, 약동하는 생명력을 잘 표현해냈다”고 평가했다.
새와 꽃 그림을 많이 그린 것이 오원의 취향이었을지도 모르나 시대적 요구였을 가능성도 크다. 조선이 말기로 접어들 무렵 새롭게 부상한 신진부유층은 정신성 높은 문인화보다는 장식적이고 구복적인 그림을 선호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더부살이하며 부평초처럼 떠돌던 장승업이 서울 수표교 근처의 역관 이응헌의 집으로 흘러들어간 건 천운이었다. 귀양 간 추사 김정희에게 귀한 책을 선물하고 ‘세한도’를 받은 이상적의 사위가 이응헌이다. 중인 신분으로, 나름 전문직 종사자로 부를 축적한 그는 중국 원(元) 명(明) 시대의 귀한 서화를 많이 수집했고 장승업은 주인의 어깨너머로 본 그림을 곧잘 흉내냈다. 다행히 안목 뛰어난 이응헌이 손 내키는 대로 그린 까막눈 천재 화가의 그림을 알아보고 격려했다. 제대로 배워본 적 없는 장승업에게 지필묵 제대로 쓰는 법을 가르쳐 준 이는 조선 말기의 도화서 화원 유숙(1827~1873)이었고, 문신이자 훗날 경술국치를 참지 못하고 자결순국한 민영환(1861~1905)이 적극적인 후원자로 나섰다. 고종을 측근에서 모시게 된 민영환이 바로 장승업을 왕실에 추천한 인물이다. 여러 기록과 구전을 짜맞추면 장승업은 1868년에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재건사업이 한창이던 경복궁 단청공사의 책임자로 처음 궁에 들어갔다. 여기서 두각을 보여 이내 도화서 ‘실관’에 특채 임용됐다. 왕의 신임을 한몸에 받아 병풍 그림을 지시받았건만 술 생각에 왕명을 어긴 전설 같은 일화가 전한다. 을사조약에 분노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1864~1921)이 ‘일사유사’에 그 내용을 적었다.
‘고종 임금이 불러들이라 명령하여 궁중에 조용한 방을 마련해주고 병풍을 그리게 했다. 미리 궁중 음식감독을 시켜 술은 많이도 말고 하루 두세 잔만 주도록 했다. 열흘이 지나자 술 생각이 간절한 장승업이 달아날 틈을 찾다 그림물감과 도구를 구하러 간다며 밤중에 탈주했다. 고종이 이를 듣고 잡아오게 했더니 이번에는 금졸(禁卒)의 의복을 훔쳐 입고 달아나기를 두세 번 거듭했다. 화가 난 고종이 포도청에 가두라 명하니 마침 민영환이 달려와 “저희 집에 가둬놓고 그림을 끝내겠습니다”라고 간청해 겨우 허락을 얻어냈다. 처음 얼마간은 정신차린 듯한 장승업이 또다시 남의 상복(喪服)을 바꿔 입고 술집으로 달아나 버렸으니 결국 지시받은 그림을 끝내지 못했다.’
그런 장승업의 호가 둘이니 하나는 술 때문에 붙은 ‘취명거사’요, 또 하나는 그림에 대한 자신감으로 스스로 붙인 ‘오원’이다. 김홍도와 신윤복을 겨냥해 ‘단원, 혜원만 원(園)이냐 나(吾)도 원이다’라는 뜻의 이름이다.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지금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고 있는 ‘조선 최후의 거장, 장승업×취화선’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삼인문년’이 도화서 근무하던 장승업의 중년기 작품이다. 세 노인이 서로 나이 자랑하는 내용의 그림이다. 천지를 창조한 반고씨의 친구였다는 이, 바다가 변해 뽕밭이 될 때마다 나뭇가지로 숫자를 센 것이 쌓여 열 칸 집을 채웠다는 이, 3,000년에 한 번 열리는 반도복숭아를 먹고 그 씨를 버린 것이 산 높이로 쌓였다는 이, 이렇게 세 노인네 옆으로 복숭아 훔치러 가는 삼천갑자 동방삭이 보인다. 호방한 필치를 자랑하는 장승업이 꼼꼼한 붓질의 공필(工筆)로 그린 게 훤히 보인다. 비슷한 시기에 그린 ‘춘남극노인’의 오른쪽 아래편에는 문맹인 장승업 대신 누군가가 적어준 것일 터이나 “대령화원 신(臣) 장승업이 바치나이다”라고 적혀있다.
장승업은 이름을 못쓰니 서명을 할 수 없어 도장을 찍곤 했는데, 그 도장마저 술 취해 곧잘 잃어버리곤 했다. 그에게 도장을 다시 새겨준 오세창과의 인연도 남다르다. 위창 오세창은 저서 ‘근역서화징’에서 이렇게 썼다. “오원 장승업은 그림에 못하는 것이 없었으니 그림을 그리면서 신운이 생동한다고 자신이 큰소리쳤는데 헛말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글자를 알지 못하였으나 명인의 진적을 많이 보았고 또한 기억력이 좋아서 비록 몇 년이 지난 뒤에라도 안보고 그리되 터럭 끝만큼도 틀리지 않았다.” 오세창과의 인연이 간송 전형필에게까지 닿아 장승업 작품 중 수작 상당수가 간송미술관 소장품이 됐다. 장승업의 화풍은 도화서 마지막 화원으로 꼽히는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에게로 전해졌고 근대미술로 직결됐다.
장승업은 정물화도 기막히게 그려냈다. ‘정물화’를 가리키는 우리식 용어는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이다. 제기와 꽃병 등 옛 골동품을 그린 ‘기명도’와 꺾인 꽃과 나뭇가지를 그린 ‘절지도’를 합친 그림이다. 이런 정물화 화풍을 ‘책가도’로 창안해 이름 떨친 이가 김홍도라면 장승업은 기명절지도를 자신만의 구성법인 ‘백물도’로 보여줬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백물도’는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명품이다. 폭이 무려 233㎝에 달하는 두루마리에 배와 수선화·국화·연꽃·인삼·무·가지 등의 식물과 배가 불룩한 중국식 청동제기, 만년(萬年)을 산다며 장수를 상징하는 수석과 지식인의 방에 어울리는 벼루와 화분 등을 배치하고 출세와 화합을 기원하는 게와 조개를 그려넣은 그림이다. 별의별 물건들이 잔뜩 있으나 결코 답답하지 않으며 드문드문 널어놓은 것 같아도 짜임새 있다. 자칫 정지화면 같은 나열식 그림이 되기 십상이나 그림에서 꿈틀대는 기운이 느껴지는 게 신통방통하다. 먹을 옅게 사용하고 이따금씩 푹 찍은 진한 먹으로 게와 이파리 등을 그린 것인데 그 붓질의 변주에 생명력이 담겼다. 특히 옛날식 제기의 아가리 부분을 짙은 먹으로 그린 다음 아래로 내려갈수록 옅어지게끔 음영법을 쓴 것이 무릎을 치게 한다. 긴장감과 평온함을 동시에 주는 이런 감각적 ‘밀당’의 귀재. 사람의 솜씨가 아니라 할 만했다. 어쩌면 장승업은 잠시 인간으로 살다 간 화선(畵仙)이었을지도 모른다.